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공식 석상에서 ‘관세’라는 단어조차 꺼내기를 꺼리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가 시행되며 비용 부담이 커졌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날 경우 비즈니스 리스크가 더 커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들은 실적 발표나 인터뷰에서도 관세 영향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거나 표현 수위를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는 21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비판한 기업에 대해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즉각적인 공격에 나서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상장 기업들이 관세의 재무적 영향을 알릴 의무와 정치적 리스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더그 맥밀런 월마트 CE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모든 압력을 흡수하긴 어렵다”며 가격 인상 가능성을 내비쳤고, 최고재무책임자(CFO) 역시 CNBC 인터뷰에서 일부 품목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플랫폼 트루스소셜에 “월마트는 관세를 탓하지 말라”며 “관세를 먹어치우라. 나도, 고객도 지켜보고 있다”고 공개 경고했다.

관세를 명확히 언급한 뒤 대통령의 반격을 받은 또 다른 사례는 장난감 업체 마텔이다. 마텔은 이달 초 실적 발표에서 중국산 부품에 부과된 145% 관세로 인해 제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고, 무역 정책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연간 실적 가이던스를 철회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마텔에 10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며 “미국에서 장난감을 하나도 못 팔게 만들겠다”는 강경 발언까지 내놨다.

위기 대응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현재 다수의 기업이 이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컨설팅 업체 글로벌 시추에이션 룸의 브렛 브루엔 대표는 “CEO 교육 과정에서 이제는 정치 리스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할 때”라며 “정치가 사업의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다”고 지적했다.

기업 내부에서는 관세라는 표현 자체를 피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비즈니스 싱크탱크인 컨퍼런스보드의 데니스 달호프 연구원은 “소싱 비용”이나 “공급망 비용”, “투입 비용” 등 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컨설턴트들의 기본 전략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관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CEO가 아닌 CFO가 하도록 분장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은 소매업체들의 분기 실적 발표에서도 확인된다. 리처드 맥페일 홈디포 CF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현재 가격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만 언급해 관세 관련 발언을 피해갔다. 브라이언 코넬 타깃 CEO도 “가격 인상은 최후의 수단”이라며 관세 문제를 에둘러 설명했다. 코넬 CEO가 지난 3월 멕시코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로 채소·과일 가격이 오를 것이라 분명히 말한 것과 비교하면 입장이 훨씬 신중해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눈치 보기’가 단기적 방어에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외면하는 셈이라고 지적한다. 스테판 마이어 컬럼비아대 경영대학 학과장은 “기업은 투자자에게 재무적 리스크를 설명할 의무가 있으며 정치적 고려로 정보를 흐리는 것은 정직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데이비드 슈워츠 모닝스타 수석 주식 애널리스트는 “기업들이 트럼프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라며 “월마트와 마텔처럼 비교적 사소한 발언만으로도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 공격을 퍼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이 관세의 영향 자체에 대해 평가를 피하고,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 CEO들이 개별적으로 대립을 피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선 집단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무역 단체들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국민과 입법자 모두 기업이 겪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며 집단적 대응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