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규제 강화를 예고했지만 미국 주요 기업들은 여전히 관련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19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은 복수의 기업 관계자를 인용, 대부분의 기업들이 DEI 정책을 철회하기보다는 용어나 표현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양성 책임자(Diversity Officer)’ 직함을 변경하거나 관련 예산을 축소하는 등 외형상 변화는 있었지만, 핵심 제도는 그대로 운영 중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월마트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DEI’라는 용어 사용을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공급업체 계약에서 인종·성별 등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겠다고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블룸버그에 따르면 월마트의 조치는 전면 철회보다 소폭 조정에 가까웠다.

현재 월마트는 ‘포용(Belonging)’이라는 표현을 DEI의 대체어로 쓰고 있으나 채용 공고에는 여전히 “DEI를 지지하는 지원자를 찾는다”는 문구를 포함한다. 일부 상품에는 ‘LGBTQ+ 창립 브랜드’라는 홍보 문구를 붙이고, DEI 인증을 받은 브랜드에 대해서도 광고를 진행 중이다.

이 같은 흐름은 월마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블룸버그가 미국 대기업 고위 임직원 20여 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 기업은 대부분 트랜스젠더 직원을 위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거나 흑인대학과 연계한 채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DEI 관련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드, 맥도날드, 딜로이트, 보잉 등은 흑인 관련 비영리단체인 서굿 마셜 칼리지 펀드(Thurgood Marshall College Fund)와 협업해 인재 채용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기업은 외부 비판을 의식해 표면적으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DEI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종합 가전 유통업체 로우스(Lowe’s)는 최근 구조조정을 발표하며 일시적으로 ‘반(反) DEI’ 기조에 동참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경영진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DEI에 대한 지속 의지를 표명했다. 지난 12월 재니스 듀프레 로우스 부사장이 “우리 경영진은 포춘 500대 기업 중 가장 다양성이 보장된 조직”이라고 자평한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직후 DEI 정책을 ‘불법적 인종차별’로 규정, 연방기관에 관련 조사를 지시했다. 1980년대 시작된 DEI 정책은 인종을 넘어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재향군인 등 다양한 소수자 그룹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202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학 입시에서 소수자 우대 정책을 폐지하면서 DEI 정책의 정당성은 다시 한번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기업 법무팀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DEI 관련 프로그램을 정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로펌 리틀러멘델슨(Littler Mendelson)이 지난 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 고위 임원의 절반 이상이 “DEI 관련 법적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법조계에서는 정부의 행정명령만으로는 민간 기업의 고용 정책 전체를 흔들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대부분의 기업은 표현과 운영방식 일부를 조정하는 선에서 DEI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고용 전문가들도 최근 기업들이 DEI 정책을 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DEI 자문사 세라마운트(Ceramount)의 수바 배리 대표는 “기업들은 빠르게 대응하고 있으며, 90% 이상의 기업은 장기적으로 DEI 정책에 큰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