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내 처방약 가격을 타국과 동일한 수준으로 인하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 전에 이 행정명령을 ‘역사상 가장 중대한 행정명령’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행정명령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 약값을 최대 90%까지 낮추며 제약 카르텔과 정면충돌한다는 점에서 주목 받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전망이 많다.

이번 행정명령은 미국 약값을 다른 선진국의 약값과 ‘평준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이 다른 선진국이 지불하는 약값 중 최저 가격을 낼 것이라며, 이를 ‘최혜국 대우(MFN)’ 가격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미국은 세계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제약사들은 이익의 3분의 2 이상을 미국에서 내고 있다”면서 “오늘부로 미국은 다른 나라의 의료 서비스를 보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2일(현지 시각) 워싱턴 백악관 루즈벨트 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약물 가격과 관련된 행정명령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 서비스 센터 관리자 메흐메트 오즈 박사, 트럼프 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 AP=연합뉴스

◇미국 약값이 비싼 이유

미국은 실제로 처방약 가격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미국 의약품 가격은 다른 선진국 대비 평균 3배에 달한다. 당뇨병 치료제 자디앙의 지난해 미국 정가는 30일분 기준 611달러인데, 이는 70달러 수준인 스위스의 약 9배 수준이다. 35달러인 일본과 비교해서는 17배 가격차이가 난다. 항응고제 엘리퀴스 역시 현재 60정 기준 미국에서는 606달러에 판매되지만, 일본에서는 20달러 수준이다.

미국 약값이 비싼 이유는 복잡한 의료 시스템 때문이다. 미국 의료 시스템은 민간 보험, 고용주 기반의 의료 보험, 메디케어(65세 이상 건강보험) 및 메디케이드(극빈층 의료보호) 등의 공공보험 총 세 가지로 구성된다. 영국 BBC는 “다른 선진국들은 중앙집중식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정부가 약값을 일괄적으로 협상하거나, 약값이 너무 비싸다고 판단되면 구매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미국은 의료 시스템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약값 협상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 정부의 약값 인하 노력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였던 2017년, 처방약 가격에 대해 “(제약 업계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약값 인하를 시도했다. 조 바이든 정부 역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정부가 메디케어 범위 내에서 가장 비싼 약물의 가격을 협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협상대상에 오른 10개 처방약의 가격은 다른 선진국 대비 최대 5배 가량 비쌌다.

그러나 약값 인하 노력은 거대 제약 회사의 로비에 가로막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첫 임기 당시 시도한 약값 인하는 제약 업계의 반발과 법원의 절차상 문제 제기로 무산됐고, 바이든 정부의 IRA는 오는 2026년부터 일부 적용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보다 비싼 편이다. NBC 뉴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미국 국민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 제약 로비와 맞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한 약국 선반에 약품이 진열돼 있다. / AFP=연합뉴스

◇업계 반발과 법적 도전 넘어야

이번 행정명령에 대한 주요 외신들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행정명령은 제약회사들이 180일 이내에 가격을 낮추도록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부 장관이 30일 동안 제약 회사들과 협력해 의약품 가격 인하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명령에는 가격 변동이 메디케어 또는 메디케이드에 적용되는지 여부가 명시되지 않았다”면서 “그 영향이 광범위하며, 민간 보험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약값을 다른 나라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 가격 비교를 하는 과정도 어렵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은 다른 나라 가격을 참고하는 것이 복잡하다고 경고한다”면서 “미국에서 판매되는 많은 약물이 해외에서 구할 수 없고, 일부 국가에서는 약값을 공개하지 않거나 가격 협상에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바이든의 IRA에 참여했던 보건 경제학자 안나 칼텐보크는 “제약 업계는 미국에서의 이익 감소를 다른 국가들의 약값에 반영하거나, 다른 국가의 약값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제품 출시를 늦출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제약 업계 반발도 거세다. 미국 내 주요 제약회사를 대표하는 미국제약협회의 알렉스 슈라이버 상무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가격을 설정하는 것은 미국 환자들에게 나쁘다”면서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하는 시점에서 정책 입안자들은 해외에서 실패한 정책을 도입할 것이 아니라, 미국 시스템의 결함을 고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 생명공학 기업을 위한 주요 무역 단체인 바이오의 존 크롤리 대표도 “최혜국 대우는 우리나라 중소 규모 생명공학 기업을 파괴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제안”이라고 말했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행정명령 역시 법적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보건 정책 변호사 폴 킴을 인용해 “이번 행정 명령이 법적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번 명령에 포함된 가격 제한 범위가 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전했다. 과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약값 인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 역시 “트럼프 대통령도 잘 알듯, 그의 행정명령은 법원에서 기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