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국적을 10억원대에 살 수 있었던 몰타 ‘황금 여권(Golden Passport)’ 제도가 막을 내릴 전망이다.

유럽사법재판소(ECJ)는 29일(현지시각) 몰타가 운영하는 투자 시민권 프로그램이 EU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자본 투자만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행에 철퇴를 내린 결정이다. 유사 제도를 운영해 온 다른 국가들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ECJ는 판결문에서 “실질적 연고 없이 투자금만으로 EU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EU 시민권의 본질을 훼손한다”며 몰타 정부에 즉각적인 프로그램 중단을 명령했다.

안나 뮐러 ECJ 대변인은 보도자료에서 “EU 시민권은 상품이 아니며, 돈으로 거래될 수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사실상 EU 차원에서 투자 시민권 제도에 종말을 선고한 셈이다.

룩셈부르크에 위치한 유럽연합 사법재판소. /연합뉴스

‘황금 비자(Golden Visa)’ 또는 황금 여권으로 불리는 투자 이민 프로그램은 특정 금액을 해당 국가에 투자한 외국인에게 거주권이나 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시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태평양 섬나라 통가는 1983년 세계 최초로 국적 판매를 시작했다. 캐나다는 1986년 투자 이민 제도를 도입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감을 느낀 홍콩 부호들을 겨냥한 조치였다.

이후 투자 이민 프로그램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남유럽 국가들에 퍼졌다. 재정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스페인(2013년), 포르투갈(2012년), 그리스(2013년)가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약 50만 유로(약 7억 4000만원) 상당 부동산을 매입하는 외국인에게 거주 허가(골든 비자)를 내줬다. 외국 자본을 유치해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몰타는 한발 더 나아갔다. 2014년부터 약 70만 유로(약 10억 4000만원) 상당 정부 기금 기부 및 부동산 투자를 조건으로 EU 시민권을 직접 부여하는 ‘개인 투자 프로그램(MIIP·MEIN)’을 운영했다. EU 회원국 시민권을 직접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런던정경대(LSE) 이민 전문가 크리스틴 수락 교수는 파이낸셜 타임스(FT) 인터뷰에서 “몰타 프로그램은 비자 없이 유럽 솅겐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하길 원하는 전 세계 부유층에게 매우 매력적인 ‘뒷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몰타 발레타 항구에 정박중인 아메리고 베스푸치함. /연합뉴스

지금도 전 세계 약 60개국이 유사한 투자 이민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EU 내에서도 키프로스,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헝가리 등이 다양한 형태로 제도를 도입했다. 투자 조건은 그리스의 25만 유로부터 오스트리아의 950만 달러(약 130억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들 국가는 프로그램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뒀다. 포르투갈은 지난 10년간 골든 비자 제도로 약 58억 유로(약 8조 6000억원) 투자금을 유치했다. 프로그램 전성기에는 이 금액이 포르투갈 전체 외국인 직접투자(FDI)의 10~1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FT는 분석했다.

그리스는 EU 최저 수준인 25만 유로 투자 조건으로 2019년까지 1만 3000개가 넘는 EU 비자를 발급했다. 비자를 팔아 유치한 자금 가운데 90%는 부동산 투자로 흘러 들었다. 이렇게 흘러 들어온 돈은 자본 수혈에 목 마른 남유럽 부동산 시장 부활을 이끌었다.

하지만 달콤한 열매 뒤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랐다. 외국인 투자금이 몰리면서 투자 이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국가마다 주요 도시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현지 서민들은 내 집 마련은커녕 치솟는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스페인에서는 2013년부터 2019년 사이 골든 비자 투자 영향으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등 주요 도시 부동산 가격이 평균 20% 급등했다.

투자 이민이 자금 세탁이나 범죄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끊이지 않았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이 부패 자금이나 불법 자금의 세탁 경로가 될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EU 집행위원회 역시 몰타 정부가 허술한 심사로 자금 세탁, 조세 회피, 조직 범죄 위험을 키웠다고 비판했다.

소피 인트 벨트 EU 의원은 로이터에 “골든 비자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나 부패한 관리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엘 마스노 지역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을 한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뉴스1

키프로스는 2020년 자격 미달 신청자들에게 시민권을 불법적으로 내준 사실이 알자지라 방송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이 문제가 부각되자 키프로스 정부는 투자 이민 프로그램을 전격 폐지했다.

부유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고급 주택가를 독점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사회적 위화감, 불평등을 키우는 문제도 불거졌다.

몰타에서는 외국인 자본이 고급 부동산 시장을 장악하는 동안 이들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 도로, 수도 등 기반 시설 투자가 지지부진해 현지 주민들 불만이 누적됐다.

잇따른 부작용과 EU 압박 속에 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제도 축소 및 폐지에 나섰다.

스페인 정부는 이달 주택 시장 안정을 이유로 내년 4월부터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했다. 포르투갈은 지난해 부동산 투자 옵션을 폐지하며 제도를 대폭 축소했다. 아일랜드는 올해 초 투자 이민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유럽 내 황금 비자 열기가 이번 판결 이후 한풀 꺾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유럽을 벗어난 다른 국가에서 투자 이민 프로그램 수요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틴 수락 LSE 교수는 “유럽에서는 황금 비자 시대가 저물고 있지만, 카리브해 국가나 아랍에미리트(UAE) 등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며 “말레이시아나 터키 같은 일부 신흥국들은 최근 투자 유치 문턱을 낮추며 제도 강화에 나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