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역에서 홍역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백신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예방 접종을 꺼리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백신 비접종률이 높아지면 공중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현지 시각)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보건 비영리단체인 카이저패밀리재단(KFF)이 응답자 13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미국 성인 대다수가 MMR 백신에 대한 음모론을 접한 경험이 있으며 이중 상당수가 사실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이 접한 음모론에는 ▲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 ▲MMR 백신이 홍역보다 더 위험하다 ▲비타민A가 홍역을 예방한다는 주장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MMR 백신은 생후 9~15개월인 영유아를 대상으로 접종하는 예방 백신으로 홍역(Measles)과 볼거리(Mumps), 풍진(Rubella) 등 전염성이 강한 질병의 확산을 막는 핵심 수단이다.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2%는 ‘MMR 백신과 자폐증 간 인과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접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33%는 ‘백신이 홍역보다 더 위험하다’, 20%는 ‘비타민A가 홍역을 예방한다’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확실히 사실’이라고 답한 비율은 각각 5% 미만이었으나, ‘확실히 거짓’이라는 응답도 절반을 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MMR 백신이 홍역보다 더 위험하다는 주장에는 43%, ▲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에는 34%, ▲비타민A가 홍역을 예방한다는 주장에는 27%만이 확실히 거짓이라고 답했다. 대다수는 ‘아마 사실일 수 있다’ 또는 ‘아마 거짓일 수 있다’는 중간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백신에 대한 불신이 확산된 배경으로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의 발언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된다. 유명한 백신 회의론자인 케네디 장관은 홍역 유행 초기 “백신 접종은 개인의 선택”이라면서 접종을 장려하기보다는 자율에 맡기는 태도를 보였고, 과거 자폐증과 백신 간 연관성을 언급한 전력이 있다. 또한 그는 홍역 예방책으로 비타민A를 언급하면서 연방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지침에 해당 내용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주장이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비타민A는 개발도상국 등 영양 결핍이 심각한 일부 지역에서 보조적 치료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으나 백신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CDC에 따르면 미국 내 비타민A 결핍 인구는 1% 미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텍사스에서 두 번째 홍역 사망자가 발생하자 6일 케네디 장관은 뒤늦게 X(구 트위터)를 통해 “MMR 백신이 홍역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예방 수단”이라며 입장을 선회했다.
KFF는 허위 사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대다수의 ‘흔들리는 중간층(malleable middle)’이 백신 불신 풍조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이들이 미국 내 백신 접종률을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KFF 조사에 따르면 세 가지 허위 주장 중 최소 하나를 ‘믿는다’고 답한 부모의 24%가 자녀에게 백신 접종을 일부 생략한 반면, 해당 주장을 모두 ‘거짓’이라 인식한 부모는 11%만이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KFF는 “허위 정보를 믿는 부모일수록 자녀의 백신 접종을 미루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약 두 배 가까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KFF는 “허위 사실에 대한 수용도가 정치 성향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며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보다 백신 관련 허위 사실에 더 쉽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낮은 백신 접종률은 공중 보건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리즈 하멜 KFF 여론조사 책임연구원은 WP와의 인터뷰에서 “홍역은 사망률이 높아 백신을 통해 집단 면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며 “소수의 미접종자만으로도 확산 위험이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