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원이 미셸 바르니에(73)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면서 62년 만에 프랑스 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르니에 총리와 그가 이끄는 내각의 전면 사퇴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후임 총리를 빠르게 임명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후임자 선정이 지연될 경우 마크롱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조기 대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62년 만에 프랑스 총리가 불신임안으로 물러난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프랑스 하원은 4일(현지 시각) 바르니에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에 대한 투표에서 331명의 찬성으로 이를 가결했다. 프랑스 헌법 5조에 따르면 의회에서 불신임된 총리는 대통령에게 사임계(사표)를 내야 하고, 내각 역시 총리와 함께 전원 사퇴한다. 이에 따라 바르니에 총리가 이끌던 내각의 모든 장관도 함께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에서 총리가 불신임으로 물러난 것은 1962년 10월 조르주 퐁피두 정부 이후 62년 만이다.

◇ 마크롱의 실험적 선택이 낳은 위기

이번 사태는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결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7월 조기 총선을 통해 정국을 재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느 정당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헝 의회(Hung Parliament)’ 상태가 됐다. 헝 의회랑 의원내각제 정부 체제에서 의회 내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어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상태의 의회를 뜻한다.

이후 마크롱 대통령은 다수당 대표를 총리로 임명하는 전통을 깨고, 우파 성향의 베테랑 정치인인 바르니에를 총리로 택했다. 이는 본래라면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좌파의 대표가 총리로 임명되어야 하는 관례에 어긋나는 결정이었다.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에서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의회 다수당의 불신임권을 존중해야 하므로 보통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직을 맡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마크롱 대통령은 바르니에를 지명하는 데에는 2개월이 걸렸지만, 이번에는 더 빨리 대체자를 찾아야 한다”이라며 “대체자 임명이 지연될 경우 마크롱을 약해 보이게 되고 금융 시장은 불안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FT는 “프랑스 정부의 장기적인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 마크롱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하고 조기 대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또한 “마크롱 대통령이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그에 대한 사임 요구는 더 커질 것”이라고 전했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 /EPA

◇ 의회 협치 실패와 장기화되는 혼란

프랑스 의회는 현재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혼합 구조다. 좌파 연합, 마크롱의 중도 성향 르네상스(Renaissance)당, 그리고 극우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 사이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 협치는 난항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마크롱은 총리 후보를 임명하기 전 다른 정당들과의 연합을 끌어내야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번 불신임안 가결을 주도한 것은 좌파 연합과 극우 국민연합의 공동 행보였다. 르펜은 의회 연설에서 “마크롱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프랑스의 운명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양심적으로 결단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크롱의 정적인 르펜은 대통령 사임과 조기 대선을 추진하는 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르펜은 유럽 의회 자금 유용 혐의로 재판 중인데, 조기 대선으로 판결 전 대권을 잡는다면 대통령 면책특권을 내세울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새 총리를 빠르게 임명해 2025년 예산안 처리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프랑스 의회는 새 예산안을 연내에 처리하지 못하면 정부 운영이 마비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를 피하고자 잠정 예산안을 통해 예산안 처리를 연기하거나,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해 예산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49조 3항은 최근 바르니에 내각 붕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만큼, 또 한 번 강행할 경우 정치적 반발을 더욱 키울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치르더라도 현재의 의회 분열 상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문제는 마크롱 개인이 아닌 프랑스 정치 제도 자체의 한계에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