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 모젤강 인근 작은 마을 솅겐에 벨기에, 프랑스, 서독,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다섯 나라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국경 검문소를 없애는 조약에 서명했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유럽 대륙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으려는 시도였다.

그로부터 40년. 솅겐 조약(Schengen Agreement)은 유로화와 함께 유럽 통합을 이끄는 두 개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29개 회원국, 4억 5000만 명 인구가 솅겐 조약 아래 국경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며 살아간다.

올해 유럽위원회가 펴낸 2025 솅겐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솅겐 체제 안에서 매년 13억 건이 넘는 여행이 이뤄진다. 매일 170만 명은 솅겐 조약으로 지워진 국경선을 넘어 다른 나라로 출퇴근한다.

코소보 국민들이 솅겐 조약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비자 없이 유럽 주요국가로 여행하기 시작한 가운데, 코소보 항공사 직원이 승객에게 '비자없이(#WithoutVisa)'라고 적힌 가방을 건네주고 있다. /로이터뉴스1

역내 무역 규모는 4조 1000억 유로(약 5800조 원)에 달한다. 국경 통제 철폐가 가져오는 관세 인하 효과만 평균 0.7%로 추산된다.

하지만 불혹(不惑)을 맞은 솅겐 조약의 오늘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40년간 쌓아 올린 ‘국경 없는 유럽’이라는 공든 탑이 불법 이민과 테러 위협이라는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16일(현지시각) 난민⋅테러 문제가 빈발하자 유럽 심장부 국가들이 40년 전 맺은 솅겐 조약을 뒤로 하고, 다시 국경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고 전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유럽연합 소속 29개국 가운데 주요국 10개국은 국경 검문소 재도입 계획을 유럽위원회에 공식 통보했다.

독일은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스위스·체코·폴란드와 맞닿은 모든 육상 국경에서 검문을 재개했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1000명이 입국을 거부당했고, 불법 입국자 1700명을 적발했다.

프랑스는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거의 10년간 6개월 단위로 지역별 국경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4월, 통제 기한을 또다시 연장했다. 프랑스에서는 선거철마다 국경 강화가 극우파 주요 공약으로 올라온다.

올해 1월 솅겐 조약에 가입한 불가리아에 인근 루마니아 관광객들이 다뉴브강변을 보기위해 방문해 산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솅겐 조약은 국가 간 경계를 사실상 철폐해 ‘하나된 유럽’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도입했다. 유럽도 장기적으로 미국 같은 ‘하나의 연방국가’가 될 수 있다는 포석이었다.

이전처럼 각국이 개별적으로 출입국을 관리하는 대신, 외부 국경만 공동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내부 국경’을 허물어 인적·물적 이동을 극대화했다. 이는 행정 비용 절감, 공급망 효율화, 인재 풀 확대 등 각국에 경제적 이득으로 직결됐다.

하지만 이민과 안보 문제에 직면하자 각국은 ‘우리 국경은 우리가 알아서 지킨다’는 각자도생의 길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유럽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EU에 불법 입국한 이민자 수는 약 23만 9000명을 기록했다. 2023년 38만 5000명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팬데믹 이전 2020년에 비하면 3배 가까이 폭증했다.

자연히 유럽 각국에서는 치안 불안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는 극우 정당 약진으로 이어지는 등 심각한 정치·사회 문제를 불렀다.

유럽 통합의 상징이 뿌리부터 흔들리자 EU 집행위원회는 국경 관리 효율성을 높이고, 안보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화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1월, 영국 홀리헤드 항구 트럭 주차장 '국경 통행 준비 안 됨' 표지판 근처에 대형 화물 트레일러가 보인다. /연합뉴스

외부 국경을 첨단 기술로 통제하는 스마트 국경(Smart Borders) 전략으로 솅겐 조약에 닥친 위기를 봉합하겠다는 구상이다. 2025 솅겐 보고서는 “입출국 절차와 시스템 부문에서 디지털화를 가속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명시했다.

EU는 내년부터 비(非)EU 국민 출입국 기록을 지문, 안면 인식 등 생체 정보로 자동화하는 입국·출국 시스템(EES)을 본격 가동한다.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ESTA)과 유사한 유럽 여행 정보 및 허가 시스템(ETIAS) 도입도 서두르고 있다. 내부 국경을 열어두는 대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문턱을 대폭 높여 불안 요소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복안이다.

전문가들은 극우 세력이 솅겐 조약 철폐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국경 검문을 다시 시작하면, 유럽 통합이라는 의미가 퇴색한다고 우려했다. 각국이 ‘임시’라는 명분으로 국경 통제를 시작하고 이를 곧 상시화할 경우 솅겐 체제는 사실상 붕괴 수순을 밟게 된다.

폴리티코는 “솅겐 체제 붕괴는 유럽 단일 시장의 위축과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후퇴를 의미하는 신호”라며 “기술적 해법보다 정치적 해결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