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품은 오늘 사는 게 가장 싸다’는 불문율이 세계 최대 고가품 시장 중국에서 옛말이 됐다.
한때 ‘없어서 못 판다’던 고가품들은 이제 중고 시장에서조차 원가보다 90% 싼 ‘눈물의 할인’ 판매에 내몰렸다.
로이터는 11일(현지시각) 중국 베이징의 한 대형 중고 고가품 매장 풍경을 전하며 “중국 경제를 뒤덮은 경기 침체 그림자가 고가품 제국 심장부까지 파고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매장 진열대에는 미국 매스티지(Masstige·대중적인 고가품) 브랜드 코치의 크리스티 핸드백이 219위안(약 4만2000원)짜리 가격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제품은 원래 3260위안(약 61만원)였다.
프랑스 고가품 지방시 2200위안(약 41만원)짜리 G큐브 목걸이는 187위안(약 3만5000원)에 불과했다. 93%에 달하는 할인율이다.
기존 고가품 업계 표준 할인율은 30~40%였다. 90%가 넘는 할인율은 사실상 ‘땡처리’에 가까운 파격적인 수준이다.
문제는 이렇게 ‘눈물의 할인’을 해도 잘 안 팔린다는 점이다.
시장조사업체 다쉬에컨설팅의 장리사 연구원은 “중고 고가품 판매자 수는 매년 20%씩 급격히 늘어나는데 소비자 수는 정체 중”이라며 “헐값 매물이 쏟아지면서 가격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기 침체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중국 소비자들은 지갑을 완전히 닫아 걸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전날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1%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CPI는 올해 들어 넉 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팬데믹 봉쇄가 풀리면 터져 나올 것이라던 보복 소비는 사라졌다. 그 자리는 끝 모를 부동산 시장 침체와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률이 채웠다.
중국 가정은 자산 가운데 70%가 부동산에 묶여 있다. 수년간 이어진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중국 중산층 자산은 공중분해 됐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중국 집값이 5% 하락할 때마다 가계 자산이 최대 2조7000억달러(약 3700조원)씩 증발한다고 추산했다. 청년 실업률은 15%를 웃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소비자들은 호황기에 샀던 중고 고가품을 줄지어 내놨다. 시장조사업체 다쉬에컨설팅에 따르면 올해 중고 고가품을 팔려는 사람은 지난해보다 20% 늘었다. 엔위, 페이유, 폰후 같은 새 중고 고가품 거래 플랫폼도 범람했다. 하지만 구매자 수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이는 지난 10여년간 중국몽에 취했던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구찌 모회사 케링(Kering) 등 글로벌 고가품 그룹에 최악의 시나리오다.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중국은 한때 세계 고가품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 성장은 커녕 글로벌 고가품 시장을 퇴행시키는 골칫거리로 변했다.
중고 시장은 새 제품을 살 돈이 없는 소비자들이 고가품을 처음 경험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고가품 브랜드 역시 이들을 미래 충성 소비자로 자랄 재목으로 봤다.
하지만 시장 비율이 30%가 넘는 시장에서 지금처럼 헐값 매물이 쏟아지면서 브랜드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가격 정책과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패션 전문 매체 보그는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중고 고가품 시장이 커지면 신규 제품 수요를 잠식한다”며 “희소성과 고급스러움이 생명인 고가품이 ‘아무나 싼값에 가질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하면 브랜드 가치가 근본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