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중국 동부 안후이성 허페이에 있는 폭스바겐 공장. 1200대가 넘는 로봇들이 중국 전략 모델이자 순수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ID. 유닉스’ 조립에 한창이었다. 자동화율이 96%에 달하는 덕에 공장 내 직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첨단 공장을 짓기 위해 폭스바겐이 허페이시에 쏟아부은 돈은 지금까지 141억위안(약 2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곳을 독일 본사를 제외한 최대 생산 및 연구·개발(R&D) 기지로 키운다는 것이 폭스바겐의 계획이다.

폭스바겐은 중국에만 39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허페이 공장을 콕 집은 이유는 무엇일까. 뤼르만 루트거 폭스바겐 안후이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 호라이즌 로보틱스, 배터리 파트너인 고션(중국명 궈시안) 모두 허페이에 있다”며 “중국은 정말 파괴적으로 변하는 시장이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를 고려한 환경이 허페이”라고 했다. 폭스바겐은 이틀 뒤인 23일 상하이 모터쇼에서 3대의 콘셉트카를 공개했는데, 이 중 순수 전기 SUV ‘ID. 에보’는 허페이 공장이 담당하게 됐다.

중국 동부 안후이성 허페이에 있는 폭스바겐 공장 내부. 자동화율 96%로 대부분의 작업을 로봇이 담당한다./폭스바겐 제공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 덕에 동부 저장성 항저우가 대표적 첨단기술 도시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와 400㎞가량 떨어진 허페이가 ‘조용한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허페이의 비결은 단일 기술만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전체 생태계를 확보하는 것이다. 허페이가 조성한 생태계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중국 최대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 등 내로라 하는 첨단기술 기업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 올해만 기업 50개 유치… 생태계 조성이 힘

지난해 12월, 화웨이와 장화이자동차(JAC)는 허페이에서 전기차 프리미엄 브랜드 ‘준제’의 슈퍼 팩토리 준공식을 개최했다. 양사는 1500대 이상의 지능형 로봇을 배치해 주요 공정을 100% 자동화한다는 계획이다. 관영 중국중앙TV(CCTV)는 화웨이와 JAC가 허페이를 택한 데 대해 “오랜 세월에 걸쳐 과학기술 혁신과 산업 혁신의 융합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지역”이라며 “신에너지차(전기차·수소차·하이브리드차) 분야에서 완성차, 부품, 에프터마켓까지 산업구조가 통합돼 있고 500여개 핵심부품 기업을 꾸준히 육성해 왔다”고 했다.

실제 허페이는 첨단 전기차 산업 부문에서 명확한 성과를 내고 있다. 허페이가 속한 안후이의 지난해 자동차 생산량은 1년 전보다 43.3% 늘어난 357만대로, 전통 자동차 산업 강자인 광둥성을 뛰어넘고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이 중 첨단기술 부문에 속하는 신에너지차는 168만4000대로, 94.5% 늘었다. 중국 주요 전기차 기업이자 허페이에 공장을 두고 있는 니오의 양이 홍보 디렉터는 “허페이에서는 지능형 전기차 산업이 지역 미래를 위한 첫 번째 산업이자 첨단 산업 발전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중국 최대 전기차 기업인 비야디(BYD)를 비롯해 창안자동차, 전기버스 전문 기업 안카이 등도 모두 허페이에 공장을 두고 있다.

그래피=손민균

허페이는 전기차 산업 외에도 다양한 첨단기술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중국 매체는 “허페이는 ‘공급망 선두 시스템’을 앞세워 반도체, 신형 디스플레이, 신에너지차 등 16개의 주요 산업체인을 갖추고 있다”며 “허페이는 18년간 양자정보산업을 기획했고, 15년간 신형 디스플레이 산업을 육성했으며, 10년간 신에너지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기다려왔다”며 “이러한 장기 계획에 따른 산업 결단을 통해 허페이는 선점 입지를 확보했다”고 했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기업 BOE와 중국 대표 음성 인공지능(AI) 기업 아이플라이텍(중국명 커다쉰페이), 중국 저고도 경제 대표 기업 이항 등이 허페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산업 생태계 덕분이다. 허페이에서 첨단기술 기업이 모여있는 바오허구는 올해 들어서만 화웨이를 비롯해 50여개의 기업 분사를 유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마을에 붙은 ‘우수 진학생’ 알림… 60개 대학서 인재 수혈

첨단기술 분야에서 허페이가 강점을 보이는 또 하나의 비결은 ‘인재 육성’이다. 지난달 22일, 허페이 근교 마을에는 ‘가오카오(高考·중국판 수능) 희보(喜報)’가 길에 게시돼 있었다. 지난해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 각 학생들의 이름을 상세히 적어둔 포스터였다. 허페이시 관계자는 “매년 우수 학생들을 이렇게 알린다”며 “학생들의 학습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 교외 마을에 부착돼 있는 ‘가오카오(高考·중국판 수능) 희보(喜報)’. 지난해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 각 학생들의 이름과 진학 현황이 나와 있다./이윤정 기자

이러한 인재들 중에서는 베이징이 아닌 지역 대학을 선택한 이들도 상당했다. 현재 허페이에는 중국과학기술대학, 허페이공과대학, 안후이대학 등 60개의 대학이 있고, 중국과학원 허페이물리과학연구소를 포함한 8개의 중앙연구기관도 들어와 있다. 판펑 안후이 공업정보화부 순시원은 “허페이공과대학을 비롯한 과학기술대학 덕에 인적 자원이 산업과 원활하게 융합되고 있다”라고 했다. 양이 니오 디렉터는 “대학 인재가 많은 가운데 산업도 발전하면서 우수 인재 채용이 더욱 수월해지고 있다”라고 했다.

첨단기술 산업 덕에 허페이의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허페이의 지역총생산(GDP)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6.1% 성장했다. 베이징(5.2%), 상하이(5.0%)보다도 높은 수치다. 중국 전체 GDP가 5.0% 성장한 데에도 허페이의 기여가 컸던 셈이다. 특히 산업 생산이 전년 동기 대비 14.8% 늘어나며 전국(5.8%) 수준을 크게 뛰어넘었다. 중국 투자 기근 속에서도 허페이의 제조업 투자는 10.4%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