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부호들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집권 이후 자산을 대거 해외로 이동시키고 있다. 루피아화 가치 급락과 과도한 재정 확장,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맞물리며 수백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유출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은 지난해 고액자산가들이 암호화폐와 해외부동산, 금으로 자산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3월 루피아화 가치 급락 이후 그 속도를 높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3월 루피아화 환율은 달러당 1만6957루피아까지 치솟으며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역대급 취약세를 보인 바 있다. 자카르타종합주가지수(JCI)는 올해 들어 10% 이상 하락했다.
인도네시아 경제가 휘청이는 주된 요인으로는 작년 출범한 수비안토 정권이 지목된다. 수비안토 대통령은 과거 군부 독재자였던 하지 모하맛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로 당시 군부 정권의 핵심 인물이다. 지난 10월 집권 이후 수비안토 대통령은 초·중·고 학생 대상 무상급식, 전국민 대상 무료 건강검진 등 무리한 복지 중심 포퓰리즘 정책을 펼쳐 재정 건전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았다.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을 잇따라 통과시켜 대규모 시위를 촉발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내외 불안정성이 이어지자 인도네시아 부호들은 새로운 투자처에 눈을 돌리는 모양새다. 블룸버그통신은 암호화폐가 루피아화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중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가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USDT는 달러와 1대1로 연동돼 가치가 고정된 코인으로 익명성이 보장돼 거액을 송금해도 감시망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최대 코인거래소인 토코크립토(Tokocrypto)의 USDT 거래량 비중은 일일 거래량의 4분의 1에 육박한다.
해외 부동산 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가족이나 지인 명의로 해외의 주거용·상업용 부동산을 매입하는 경우다. 한 익명의 현지 프라이빗뱅커(PB)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가 자금세탁 방지 조치를 대폭 강화하며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지역이 떠오르고 있다”며 “두바이와 아부다비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역외탈세를 시도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금 매수도 증가세다. 인도네시아 최대 민간 금 유통업체 하르타디나타 아바디(PT Hartadinata Abadi)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금 판매량은 전년 대비 30% 증가, 2017년 상장 이후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수비안토 행정부가 재정건전성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정책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데디 디나르토 글로벌컨설 수석 애널리스트는 “정권에 대한 불신이 루피아화 가치 급락과 증시 매도세로 이어지고 있다”며 “정책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면 국부 유출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