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한 호텔. 46년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왕관 없는 황태자’가 외신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쫓겨난 이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레자 팔라비(64)였다.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사일을 주고받으며 일촉즉발 위기로 치닫자, 그는 지금이 정권 교체 ‘골든타임’이라 판단했다. 팔라비는 서방을 향해 “이란 민주화를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해달라”고 호소하며 스스로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로이터 등 외신은 그의 이번 선언을 46년 망명 생활 최대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이란의 마지막 샤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 아들이자 이란 야당 지도자 레자 파흘라비가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국제 정세는 그의 구상과 완전히 다르게 움직였다. 야심 찬 정권 재창출 선언은 하루 만에 빛이 바랬다. 바로 다음 날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이란이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중재로 두 나라 군사적 긴장감이 급속도로 봉합되면서 팔라비가 주장한 이란 정권 교체론은 순식간에 동력을 잃었다.

한국에서 레자 팔라비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그는 1979년까지 이란을 통치했던 모하메드 레자 샤 팔라비 아들이다. 혁명이 터질 당시 그는 17세 나이로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란혁명 이후 그는 왕족에서 가족과 함께 이집트, 모로코, 미국 등지를 떠도는 방랑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46년간 그는 단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인 샤는 ‘백색혁명’이라 불리는 급진적 서구화 정책으로 이란을 산업화로 이끌었다. 당시 이란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로 불릴 만큼 자유롭고 화려했다. 여성들은 히잡 대신 짧은 치마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바크(savak)라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을 위시한 철권통치와 고질적인 부패가 자리했다.

이란산 석유에서 나온 막대한 부는 왕실과 소수 엘리트 계층이 사치를 위해 사용했다. 국민 대다수는 극심한 빈부 격차에 시달렸다.

강압적인 서구화 정책에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지식인과 학생들은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권위주의 독재에 등을 돌렸다.

결국 샤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끈 혁명에 밀려 쓸쓸히 권좌에서 내려왔다.

시위대가 2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연방 건물 밖에서 이란 정권 교체를 촉구하며 레자 파흘라비 포스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팔라비는 이번 파리 회견에서 절박함을 숨기지 않았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그는 기자회견에서 서방을 향해 “이란의 폭력적인 정권과 협상해 생명줄을 다시 던져줘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이어 스스로를 ‘이란 군부와 관료 조직 대부분을 끌어안아 질서 있는 정권 이양을 이끌 유일한 대안’이라고 내세웠다.

그는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인터뷰에서도 “나는 왕이 되려는 게 아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이란 국민이 스스로 체제를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방과 이란 민심은 냉담했다.

팔라비의 호소에도 미국은 이란과 확전이라는 최악 사태를 피하기 위해 휴전이라는 현실적 타협안을 택했다. 팔라비가 확보한 이란 내 지지 기반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를 정권 이양 대상으로 삼는 위험한 판단을 지지할 의향이 없다는 뜻을 명확히 한 셈이다.

여전히 이란 내부에서는 팔라비 왕조 집권기에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2022년 소위 ‘이란의 봄’으로 일컫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란 전역을 휩쓸었을 당시 시위대는 “독재자에게 죽음을, 그게 샤든 최고지도자든!”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현 신정(神政) 체제에 격렬히 저항하는 동시에, 과거 왕정 복귀에도 명확히 선을 그었다.

시위대가 2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NATO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란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동안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망명 중인 이란 레자 팔라비 왕자, 야스민 팔라비 사진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현 이란 젊은 세대에게 팔라비 왕조는 독재와 부패가 가득했던 떠올리기 싫은 과거라고 분석했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이란 연구소 가만(GAMAAN)이 이란 내 15만8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81%가 이슬람 공화국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레자 팔라비를 지지한다는 응답자 역시 39%에 그쳤다.

팔라비가 주장하는 ‘민주화 투사’로 본인 역할과 이란 민심 사이 간극이 깊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루살렘 포스트는 전문가를 인용해 “이란 국민들은 낡은 왕이 돌아오기 보다 온전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새로운 공화국을 원한다”며 “이번 휴전으로 이스라엘과 갈등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그가 기대했던 정권 교체 동기마저 당분간 사라졌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