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이래 35년간 이란에서 ‘살아있는 신’ 혹은 ‘신의 대리인’으로 군림해 온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86) 시대가 저물고 있다.

18일 영국 기반 반(反)이란 매체 이란인터내셔널과 예루살렘 포스트 등은 “하메네이가 최근 이스라엘군 족집게 공습으로 군 최고사령관, 핵 전문가 등 손발 같던 최측근들을 모두 잃고, 심각한 정신적 충격에 빠졌다”고 전했다.

현재 그는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주요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가족과 함께 이란 북부 지하 벙커에 은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이 국가적 위기를 맞은 현재, 신정(神政) 체제를 이끄는 신의 대리인이 지하 벙커로 도망치면서 전시 지휘부가 사실상 무너진 초유의 사태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2025년 2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회의에서 공군 장교들의 경례를 받으며 국가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란 통치 체제에서 최고 지도자는 대통령 위에 군림한다. 사법, 외교, 국방 등 모든 국가 중대사를 최종 결정하는 절대 권력자다. 종교 지도자가 입헌 군주제에서 왕 역할을 하는 셈이다.

35년째 최고 지도자를 역임한 하메네이 역시 그 자체가 곧 이란의 주권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은 그의 신성을 정면으로 겨눴다. 이스라엘은 이번 공습으로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지휘하던 핵심 지휘부, 과학자들 동선을 미리 파악해 족집게처럼 한 명씩 제거했다. 무차별적 폭격이라기보다 정교한 참수 작전에 가까웠다.

이란 군부 서열 1위 총참모장부터 혁명수비대 총사령관, 전시 최고사령관 등 하메네이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란 군사 지도부는 이번 공격으로 한순간에 증발했다.

하메네이 통치 기반을 무너뜨리고, 그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강도 높은 심리전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2023년 10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석한 시위자들./연합뉴스

국제사회 역시 한 나라 수장인 하메네이 목을 직접 겨누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5일 “이스라엘이 하메네이를 죽이려 했지만, 내가 일단 지켜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목숨을 두고 마치 생사 여탈권을 본인이 쥔 듯한 발언이다.

이스라엘 카츠 국방장관은 한술 더 떴다. 가츠 국방장관은 17일 “하메네이는 본인 정권이 사담 후세인처럼 끝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본인 안위조차 보장할 수 없는 지도자가 국가를 통치하기는 불가능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최고 지도자 죽음과 축출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사례는 하메네이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하메네이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이란 이슬람 혁명 수비대 사령관 호세인 살라미(오른쪽 4번째)와 IRGC 항공우주군 사령관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오른쪽 3번째)가 2025년 1월 테헤란에서 최고 지도자와 관리들과 회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하메네이는 어느 중동 국가보다 빠르게 서구화됐던 이란 사회를 급격히 뒤로 돌려 놓은 장본인이다. 1989년 집권 이후 하메네이는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했다. 미니 스커트 같은 서구 문화도 철저히 배격했다.

핵개발도 하메네이가 시작했다. 이란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우라늄 농축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현재 농축 농도는 60% 수준에 근접했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90%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하메네이는 2009년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란판 민주화 시위 ‘녹색 운동’을 탱크를 동원해 짓밟았다. 폭압적인 통치에 핵무기 개발까지 겹치면서 이란은 하메네이 재임 기간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했다. 연이은 무역 제재에 이란 경제와 국민들 삶 역시 파탄 났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이란 연구소 가만(GAMAAN)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란 국민 가운데 90%가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할 정도로 민심 역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2023년 11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IRGC 항공우주군 성과 전시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이미 세계의 시선은 ‘하메네이 없는 이란’으로 쏠리고 있다.

카림 사드자드푸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수석 연구원은 프랑스24 인터뷰에서 “하메네이가 스스로 초래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며 “그는 이란을 전쟁에서 이끌 만한 신체적, 인지적 통찰력이 부족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하메네이 유고(有故)는 곧 후계 구도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예고한다. 현재 이란에서는 하메네이 둘째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그의 뒤를 이을 유력 후계자로 거론된다.

아라쉬 아지지 보스턴 대학교 중동학 수석 연구원은 “하메네이가 86세로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평소에도 일상적인 지휘권은 미래를 놓고 경쟁하는 다양한 파벌이 가지고 있었다”며 “이번 전쟁으로 권력 이양 속도가 더 빨라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권력 공백이 내전에 가까운 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이슬람 강경파인 혁명 수비대는 최고 지도자 자리를 하메네이 혈육이 세습하는 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뉴욕타임즈(NYT)는 전문가를 인용해 “하메네이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현재 갈등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행위”라며 “중동 전역에 예측 불가능하고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