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LA) 불법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미국 민주당 유력 차기 대권 후보인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정면대결을 펼치고 있다.
트럼프가 LA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주지사 동의 없이 주방위군을 투입하자, 뉴섬은 즉시 “군 투입은 고의적 선동이자 긴장을 고조시키는 조치”라고 반박했다.
현지 매체들은 뉴섬이 정치 입문 후 30년 가까이 기득권에 맞서는 반골(叛骨) 기질을 이번 기회에 더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모처럼 반(反)트럼프 진영 선봉에서 진보적 저항 정치인 이미지를 집대성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뉴섬 주지사 사이 갈등은 9일(현지시각) 체포 발언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트럼프는 이날 LA 주정부가 시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으며 “나라면 (뉴섬을) 체포할 것”이라고 했다.
뉴섬은 즉각 X(트위터)에 “미국 대통령이 방금 현직 주지사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며 “민주당원이든 공화당원이든, 이건 미국인이라면 넘어선 안 될 선이다. 권위주의로 향하는 명백한 발걸음”이라고 맹비난했다.
뉴섬은 현재 민주당 내에서 반트럼프 기치를 가장 선명하게 내건 인물이다. 1996년 정계 입문 후 뉴섬은 2004년 샌프란시스코 시장에 올랐다.
뉴섬은 시장 취임 후 당시 연방법 위반을 무릅쓰고 동성 결혼 허가증을 발급하도록 지시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었다. 당시 민주당 소속 원로 상원의원들조차 “(동성 결혼이) 당에 해가 될 것”이라며 뉴섬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이라며 밀어붙였다. 결국 11년 뒤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후 햇병아리 정치인이었던 뉴섬은 승승장구했다. 캘리포니아 부지사를 거쳐 2019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오르며 존재감이 급등했다. 이번 트럼프와 맞대결 역시 이런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그의 반골 기질은 독특한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뉴섬은 샌프란시스코 명문가 4대손이다.
하지만 부모가 이혼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엔 심각한 난독증(Dyslexia)으로 고생했다. 난독증은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경발달장애다. 그는 지금도 심한 난독증으로 연설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뉴섬의 아버지는 석유 재벌 게티 가문과 교류하는 상류층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았다. 명문가 이름을 달았지만, 현실에서 소외된 이질적인 경험은 훗날 그가 민주당 핵심 세력에 오른 이후에도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에 집중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번 사태 대응에서도 뉴섬은 직설적인 발언을 여과없이 선보였다.
뉴섬은 9일 MSNBC 인터뷰에서 “트럼프와 8일 밤 약 20분간 매우 정중한 전화 통화를 했지만, 그는 LA 상황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주방위군 배치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고 전화 내용을 폭로했다. 보통 대통령과 주지사 간 통화 내용은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군이 주도하는 강경한 시위 진압을 ‘배신’으로 규정했다. 이어 “이는 이민 문제를 넘어 권위주의적 성향, 통제와 명령, 권력과 자아에 관한 것”이라며 “트럼프는 위대한 민주주의 핵심 원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캘리포니아주는 눈엣가시 같은 곳이다.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지리적 특성 덕분에 중남미계 이민자가 많다. 주지사 역시 뉴섬처럼 전통적으로 진보 정책을 고수하는 민주당에서 나왔다.
강력한 불법 이민 단속과 DEI(다양성·공정성·포용성) 정책 폐지를 내건 트럼프에게 캘리포니아와 뉴섬 주지사는 국정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존재다. 뉴섬 주지사는 기후변화 대응에서도 연방 정책과 반대로 2035년까지 가솔린 자동차 판매 금지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독자 행보를 취했다.
주요 매체들은 이번 사태로 뉴섬이 ‘절대권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뚜렷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던 민주당에서도 반트럼프 정서를 구축하기 좋은 유력한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심각한 지도력 공백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 대선 참패 이후 여전히 당을 이끌 확실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내에서는 83세 버니 샌더스까지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된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OC) 등이 잠재적 후보군에서 젊은 축에 속하지만, 이들은 아직 당 전체를 아우르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이번 사태는 뉴섬이라는 인물이 30년간 일관되게 보여준 정치 스타일과 트럼프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필연적인 대결”이라며 “뉴섬에게는 이번 민주당 지지층을 결집해 차기 대선주자로 입지를 다질 기회”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