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Gucci), 발렌시아가, 생로랑 등 세계적인 고가품 브랜드를 거느린 케어링(Kering) 그룹 창립자 프랑수아 피노(88) 회장이 평생 쌓은 부(富)가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다.
이달 피노 회장 순자산은 2021년 정점(약 640억달러·약 92조원) 대비 3분의 1 수준인 220억달러 선까지 추락했다.
25일(현지시각) 블룸버그는 자체 집계하는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에서 피노 회장이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밝혔다. 피노 회장이 100위권 안에 들지 못한 것은 블룸버그가 해당 집계를 시작한 2008년 이래 최초다. 피노 회장 자산은 불과 4년 만에 60조원 넘게 급감했으며, 올해도 4개월 남짓한 기간 사이 지난해 말에 비해 자산이 29% 줄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룹 핵심 브랜드 구찌다. 구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다. 25일 공개한 구찌 올해 1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급락했다. 부정적이었던 시장 예상치(-22%)보다 더 좋지 않았다.
구찌가 케어링 그룹의 애물단지가 된 데는 인재 유출이 결정적인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2022년까지 구찌 브랜드를 절정으로 이끌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발렌티노로 떠난 이후 구찌는 2023년부터 브랜드 콘셉트를 재정립하지 못해 영업 부진을 겪고 있는 상태다.
블룸버그는 “구찌가 올해 케어링 그룹 전체 매출을 14% 끌어내렸다”고 전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케어링 그룹 1분기 실적 발표 이후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를 잇달아 10~15% 하향 조정했다. 실망스런 실적이 발표되자 25일 유로넥스트 파리에서 케어링 그룹 주가는 장중 5% 하락했다.
이미 케어링 그룹 시가총액은 지난 1년 사이 45% 이상 날아갔다. 거의 반토막이 난 상태다. 시가총액은 구찌 인기가 한창이던 2022년 4월 대비 4분의 1로 가라앉았다.
금융정보업체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 애널리스트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구찌가 다시 이익을 기록하려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노가 이끄는 케어링 그룹이 고전하는 사이, 명품 업계 내 양극화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구찌가 두 자릿수 매출 감소를 기록한 같은 기간, 경쟁사 에르메스(Hermès)는 매출이 12% 늘었다. 유로넥스트 파리에 상장한 에르메스 주가는 올해 초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루이비통(Louis Vuitton)을 보유한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 그룹은 올해 주춤했지만, 케어링 그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선방했다. LVMH는 올해 1월 이후 주가 하락 폭이 18%에 그쳤다.
제프리스 등 투자은행 애널리스트들은 “구찌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총괄 디자이너) 사바토 데 사르노가 브랜드를 새로 단장한 효과는 빨라도 내년 하반기에나 나타날 것”이라며 “이어지는 올해 2분기에도 추가로 (구찌)매출이 두 자릿수로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상황이 악화하자 피노 가문 지주회사 아르테미스(Artemis)는 보유한 파리 핵심 상업지구 부동산 지분을 팔기로 했다. 피노 가문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가지고 있던 파리 부동산 60%를 사모펀드 아르디안(Ardian)에 8억 4000만유로(약 1조 2000억원)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피노 가문이 처한 재정적 압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일각에서는 피노 회장 자산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을 들어 미술품 수집 활동이나 작품 경매 시장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프랑수아 피노 회장은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로 명성이 높다. 현재 피노 가문은 약 1만 점, 가치로는 30억달러(약 4조원) 규모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동시에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팔라초 그라시’ 같은 유명 미술관을 직접 운영한다.
예술 전문 매체 아트넷 뉴스는 전문가를 인용해 “피노 가문이 여전히 미술관 운영과 기존 컬렉션 유지에 충분한 재정적 여력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일부 현대 작가 작품 신규 매입 속도는 이전보다 더뎌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다만 피노 회장 본인은 최근 “예술은 경기 변동과 무관한 장기적인 투자”라며 소장품이나 미술관 매각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프랑수아 피노 회장 자산 회복 여부가 구찌 부활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 산하 연구기관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만약 구찌가 2025년 말 공개할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첫 컬렉션에서 성공적으로 반등한다면, 피노 회장 순자산은 1년 안에 250억달러 수준까진 회복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반대로 구찌 부진이 길어질 경우, 케어링 그룹과 피노 가문은 심각한 장기 침체 국면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투자은행 HSBC의 고가품 산업 전문가 룩 클레이먼은 23일 보고서에서 “구찌 재도약은 단순히 디자이너 교체로는 불가능하다”며 “전반적인 브랜드 전략과 마케팅, 유통 채널을 재정비하려면 최소 18개월은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