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이라 하면 대표적인 이미지로 ‘장수 기업’을 떠올린다.
유독 일본 장수 기업이 실제로 많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상대적으로 일찍 산업화가 이뤄진 탓에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일본 기업은 한국 기업이 벤치마킹하며 기술을 따라갔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장수 기업, 그 중에서도 기업 규모가 작은 오래된 중소기업에 관해 꾸준히 연구해온 ‘일본 전문가’ 오태헌 경희사이버대 일본학과 교수가 일본 장수 기업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나왔다. 일본 기업에 관해서만 벌써 10번째 출간인 그에게 이번엔 어떤 못 다한 이야기가 남았던 걸까? 16일 서울 이문동 경희대 오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면서도, 예상치 못한 분석으로 때론 고개를 가로젓게 만드는 일본 강소 깅업에 대한 오 교수의 분석을 공유한다.
-’딥(DEEP) 경영’이란 화두로 일본 장수 기업의 속성을 찾았는데, 어떤 개념인가.
“일본 장수 기업들의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제가 구분하게 된 개념입니다. 이중성(Duplicity), 전문성(Expertise), 확장성(Extendability), 영속성(Permanency)을 뜻하는 각각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 한우물을 파는 깊은 경영이란 뜻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일본 기업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일단 폐쇄적이라고 봅니다. 일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만의 ‘다름’으로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성장을 입증했습니다. 이제는 한국 기업에서도 거의 사라진 종신고용이라든지, 연공서열이란 문화가 서구 자본주의 시장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불합리하게 보였겠습니까?”
-일본 기업은 여전히 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모델인가요?
“그동안 한국 기업들이 일본을 참고하며 성장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죠. 일본의 다양한 기업 경영 노하우나 정부 정책 등을 참고했던 것이죠. 한국 기업들이 우리 식으로 접목해서 더 발전시킨 것들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대로 따라 한 것들도 있죠.
그러나 이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에선 배우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라 봅니다. 특히 장수 기업이 되기 위해 일본의 모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것이에요.”
-한국 기업들도 딥(DEEP) 경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장수하는 일본의 강소기업의 특징을 살펴보고 분석한 결과로 보면, 어쩌면 배울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강소기업이 나오는 배경을 학습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건 수백년간 이어온 일본 기업 문화와 밀접히 관련됐습니다. 좋다고 다른 나라 기업들이 일본 장수 기업을 따라한다고 성과가 있을까요? 저는 미지수라고 봅니다.
경제나 기업의 초기 성장 단계에선 우리가 일본을 참고하면서 커온 것이 맞지만 지금 상황에서 일본의 강소기업을 배우기엔 한계도 있습니다.조금 더 나가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경영을 보면 이젠 우리가 잘 하는 걸 잘 살려가면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어떤 부분에선 일본이 한국을 배우려 하는 부분도 있지요, 특히 최근의 한국 기업들의 성장은 일본 기업들이 못 하는 분야에서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어요. 이젠 우리 만의 경영 자원을 찾아 갈고닦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 기업에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일본 같은 강소 장수 기업이 나오긴 어려워 보입니다. 이건 두 나라의 기업 경영의 수준 차가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영자의 마인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국과 달리 일본은 기업의 매출 같은 외형보다 존재가치에 더 방점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관점도 한국와 일본이 매우 다릅니다. 매출 하락이 한국에선 잘 용인되지 않지요. 하지만 일본은 비록 적자가 나더라도 영속성을 유지한다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공감대도 만들어져 있고요. 외적 경영 지표만 놓고 보면 한국적 시각으론 일본의 강소기업들이란 곳들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내면을 알면 이해가 갑니다. 이런 부분을 한국 기업들은 배우기 어려울 겁니다. 사회경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지도 않은 것도 문제죠. 어쩌면 그걸 배울 에너지를 다른 데 쓰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오 교수는 일본 기업은 시작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합리적 판단을 떠나, 어떤 산업이 쇠퇴하거나 매출이 감소해도 무조건 기업을 지키는 것이 기업인의 도리라 여기는 게 일본 경영문화의 속성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딥 경영이 대기업에서는 통할까요?
“부분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대기업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기엔 또 일본 대기업의 독특한 성격이 있거든요. 일본 대기업을 보면 중구난방 문어발식 사업 확대를 하지 않아요. 누가 보더라도 “이 회사가 왜 이런 것 까지 하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사업 분야에는 진출하지 않아요. 돈이 보인다고 불쑥 신사업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본 대기업은 사업 다각화도 본업 역량의 한도 안에서 대체로 이뤄집니다.
예컨대 후지필름의 경우 본업이 사양산업으로 빠져도 돌파구를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찾았습니다. 후지필름은 그동안 축적한 기술을 이용해 화장품과 화학분야로 돌파구를 찾았지요. 이런 식으로 일본 대기업들은 한 뿌리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쪽이지, 다른 나무를 심는 데는 주저하는 편이죠. 이런 부분만 보더라도 한국 대기업들과는 속성이 많이 다르죠.”
-딥 경영의 4가지 속성이 굳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요?
“전통과 혁신을 모두 가진 영속성, 전문성, 확장성, 영속성이란 4가지 속성은 어느 나라의 기업이든 각론적으로는 모두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다만 총론적으로 봤을 때, 일본만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기업문화의 차이점이 한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들과 너무 명확히 구분되는 점이 많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배우고 싶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거든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한국은 어떻게 비교될까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 경제가 쇠퇴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는데, 사실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지 나빠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잃어버린 30년이란 말은, 일본은 쇠퇴하지 않았으나 다른 나라의 성장세에 상대적으로 밀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 과거와 같은 성장은 불가능할 거로 봅니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맞고, 한동안 그 정도 위상은 유지하겠지만, 미래를 선도할 일본 기업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죠.
어쩌면 일본 대기업은 버티기 더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일본 내부에서는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죠. 일본은 더 이상 성장에 얽메이거나 성장을 위한 절박함이 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다.
문제는 한국입니다. 우리도 잃어버린 30년을 맞을 우려가 있습니다. 지방 소멸과 고령화, 인구감소 등이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거든요. 일본을 보면서 사전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우리도 걱정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일본을 참고하고 따라가며 배웠다면, 이젠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잘못한 것을 보고 배워야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겁니다. 대응의 핵심은 일본이 하지 못한 것들을 학습하고 마련해야 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