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과 경험을 바꾸고, 더 나아가 산업의 흐름에 섬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 탠저린의 창업자 마틴 다비셔(Martin Darbyshire)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겉모습을 바꾸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다비셔 창업자는 40년 가까이 애플, 영국항공, LG 등 다수의 기업과 협업하며 기술과 경험, 브랜드 전략이 만나는 접점을 디자인으로 풀어낸 인물이다.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다. 최근 강연차 서울을 찾은 다비셔 대표를 만났다. 어떤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답이 돌아왔지만, 어떤 질문에는 한참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모습에서 디자인에 대한 그의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마틴 다비셔 탠저린 창업자- 영국 런던예술대 센트럴 세인트 마틴 산업디자인, 현 탠저린 최고경영자(CEO), 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25’ 심사위원, 전 국제산업디자인협의회(ICSID) 이사회 위원, 전 세계디자인수도(WDC) 심사위원

한국 방문 계기가 궁금하다.

“한국 기업에 디자인 리더십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마침 한국 고객사와 미팅도 예정돼 있다. 고객사를 만날 때 고위급 임원이나 경영진과 직접 대화하려고 한다. 기업의 디자인 전략은 ‘톱다운’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디자이너가 중간 관리자나 실무자에게만 설명하는 구조로는 기업의 전략적 전환을 이끌기 어렵다.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의 외형만 바꾸는 게 아니다. 조직의 방향성 자체를 바꾼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을 하려면 독창적 사고와 대담하고 강한 의사 결정이 필요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돼야 한다. 애플을 비롯해 디자인으로 성공한 기업 대부분이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 내가 고객사 경영진과 직접 대화하는 이유다.”

한국에선 현대차·기아가 디자인 중심 경영을 통해 브랜드 혁신에 성공한 것 같다.

“현대차·기아는 기술과 인재 그리고 디자인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과감한 투자를 한 기업이다. 특히 피터 슈라이어를 최고디자인책임자(CDO)로 영입한 결정은 대담하면서도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단지 그의 디자인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디자인 감각은 물론, 조직 내 소통 능력과 신뢰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다. 최고경영진으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중을 받았고, 그것이 현대차·기아가 변화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이었다고 본다.”

올해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 심사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

“보통 여러 명의 심사위원이 함께 논의하고 다수의 동의가 있어야 수상이 결정된다. 그럼에도 나에게 수상작이 되기 위한 핵심 요건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가’이다. 사용자 경험을 끌어올리거나, 기존 문제를 더 똑똑하게 해결하거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디자인 업계에만 40년 가까이 있었다. 여전히 심사 과정에서 ‘아, 이 디자인은 정말 신선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

“물론이다. 심사하다 보면 수많은 디자인을 보게 된다. 대부분은 평범하거나 예상 가능 범주에 있다. 하지만 가끔 어떤 디자인은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감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거나 경험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 디자인은 정말 ‘이건 뭔가 다르다’고 느껴진다. 깊은 울림을 준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한참 고민한 뒤)디자인은 단순히 외형을 꾸미는 것을 넘어, 진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닌 분야다. 탠저린이 맡았던 수많은 프로젝트 중 가장 의미 있던 프로젝트는 겉모습만 바꾼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좋은 디자인이다. 인간의삶과 경험을 바꾸고, 더 나아가 산업의 흐름에 섬세한 변화까지 가져오는 그런 디자인 말이다.”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최근 탠저린에서 영국항공의 퍼스트클래스 객실 디자인을 맡았다. 승객이 실제로 경험하는 서비스 품질을 바꾸는 데 집중했다. 일례로 좌석 칸막이의 문 위치를 옆이 아닌 앞으로 바꿨다. 그럼 승무원이 기내식을 승객의 앞쪽으로 제공하게 된다. 서비스가 훨씬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바뀌는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경험인가.

“그렇다. 제한된 자원으로 더 나은 경험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디자인이다. 많은 사람이 혁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혁신처럼 보이게 하려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은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자 경험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요즘 인공지능(AI)이 다방면에 쓰인다. 당신도 AI를 사용하나.

“애니메이션의 배경 화면을 만들거나 가상의 건축 이미지를 생성할 때 AI를 자주 활용한다. 분명 AI는 디자인 분야에서도 효율성을 높이고, 작업을 간소화하며, 노동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독창성과 책임감이란 디자인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올봄 챗GPT를 활용해 실사 사진을 만화풍으로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AI 때문에 창작물의 고유성이 희미해지는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것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는 반복적 과정이다. 물론 창작물의 고유성은 중요한 문제다. 핵심은 ‘어떤 의도로, 어떤 방식으로 AI를 사용했느냐’다. 특히 AI는 모든 프롬프트가 기록으로 남는다. 타인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했다면, 자신의 창작물이 정당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명확히 설명할 책임이 따른다.”

AI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나.

“위기라기보다 인간과 AI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걸 더 느낀다. 가령, 텍스트 생성에서 챗GPT는 강력하다. 하지만 챗GPT는 결국 도구일 뿐이다. 분석이 틀릴 수 있다. 문제는 AI가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과 기계의 본질적인 차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과 판단이 중요하다. AI가 업무 효율성은 높일 수 있지만, 생각의 깊이나 본질적인 문제 인식까지 인간을 대체하긴 어렵다.”

디자이너는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는 직업이다. 당신은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나. 본인만의 루틴이 있나.

“특별한 루틴은 없다(웃음). 다만 새로운 경험을 중시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다. 흥미로운 사람과 만나고, 세상을 관찰하며, 다양한 자극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 칸막이에 갇혀 일하는 디자이너를 볼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갇힌 환경에서 과연 제대로 도전받고, 질문받고, 자극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밖으로 나가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해야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지 않나.”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에게 조언을 준다면.

“많은 젊은 디자이너가 더 정교한 결과물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 디자인이 최선인가’ ‘이게 정말 옳은 방향인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만든 결과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질문에서 출발한 디자인이 중요하다. 디자이너도 기자처럼 끊임없는 사고와 탐색, 독창성이 필요한 직업이다.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단지 더 나은 무언가에 조금씩 가까워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너선 아이브의 ‘다른 것을 하기보다, 더 나은 것을 하라’는 말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이라고 믿는다.”

+Plus Point

탠저린은 어떤 기업?

세계 최초 침대형 비즈니스석 설계⋯애플·LG·현대차 제품 디자인 맡아

탠저린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영국항공의 평면 침대형 비즈니즈석. /탠저린

탠저린은 마틴 다비셔가 1989년 창업했다. 초기 고객 중 애플이 있었으며 조너선 아이브가 재직한 바 있다. 탠저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 영국항공과 협업해 진행한 비즈니스석 디자인이다. 180도로 완전히 누울 수 있는 침대형 좌석을 세계 최초로 설계해, 항공기 좌석 디자인의 기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0년대 초부터 LG전자의 가전과 휴대폰 디자인을 다수 맡았다. 이후 이니스프리, 신도리코, 현대차, 레인보우로보틱스 등 국내 주요 기업과도 협업해 디자인 전략과 제품 경험 개선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