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실적 반등 기대감이 컸던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終戰)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미국의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로 원유 시추가 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원유 가격의 강세가 이어지면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계속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 인도분 선물 가격은 전날보다 2.12달러(3.1%) 상승한 배럴당 71.4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월 중순 이후 5주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WTI는 지난 3월 10일 배럴당 66.03달러에 거래된 이후 한 달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유가가 최근 상승하는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기대감이 줄어든 점이다. 지난 1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협상은 지지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에 대해 “우크라이나와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하는 국가에 25~5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러시아산 원유를 사는 국가의 기업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지 못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은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에 호재가 될 것으로 점쳐졌다.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가 풀리면 러시아산(産) 원유가 다시 공급돼 원유 수입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지금은 중국이 러시아산 원유를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해 값싼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고 있다. 한국 업체는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실적이 눈에 띄게 악화됐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2023년 중국의 원유 수입 규모는 5억6399만t(톤)으로 전년 대비 11% 늘었으나 수입액은 3355억달러(약 485조8700억원)로 오히려 7% 감소했다. 싼 값에 러시아산 원유를 대거 수입한 것이다. 반면 국내 기업은 러시아산 원유와 나프타를 수입하지 못해 원가 부담이 커졌다. 2023년 기준 중국은 t당 595달러에 원유를 수입한 반면 한국은 8% 비싼 t당 643달러를 지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정책도 국내 석유화학 회사의 실적 회복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로 인해 파이프 등 시추 시설의 원가가 급등해 미국 에너지 업체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셰일오일 시추를 늘려 에너지 가격을 떨어뜨리겠다고 공언했다. 석유·가스 생산 확대를 독려하겠다며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뚫어라 뚫어라)’이란 구호도 외쳤다. 미국의 원유 공급량이 늘면 국제유가가 하락해 국내 석유화학 업체의 원유 수입 부담이 줄어든다.
로이터에 따르면 지난달 12일 철강·알루미늄에 관세 부과 조치가 발효된 후 미국 에너지 업계에서는 실적 악화 우려가 늘고 있다. 에너지 기업들은 시추·정제 시설 등을 만드는데 많은 철강을 필요로 하는데, 관세 부과로 비용이 급증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셰일 업체가 밀집한 미국 텍사스의 댈러스연방준비은행(FRBD·Federal Reserve Bank of Dallas)이 최근 석유가스업체 임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시추 투입 비용 지수는 30.9로 전분기 23.9에서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권효재 COR 에너지 인사이트 대표는 “미국 에너지 기업은 시추와 수송에서 많은 철강재를 사용하는데, 수입품에 관세가 부과되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치지만, 미국 내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량이 늘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