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처마 단청 장식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한 인물이 자리했다. 신성해 보이는 미니어처 제단엔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졌다.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민준홍(41) 작가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이길이구(2GIL29) 갤러리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민 작가는 도시 공간과 건축 구조물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 사회의 불안과 소비주의를 탐구해 시각화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전시 제목인 ‘그럼에도, 풍차는 돌아간다(Nevertheless, the windmill runs)’는 철학자 칼 폴라니가 1944년 집필한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라고 비유한 데서 착안했다.
지난 10일 갤러리에서 만난 민 작가는 “맷돌이 돌아가는 이미지가 자본주의라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이를 통해 많은 행복감과 혜택을 누린다”며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민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후 영국의 UCL 슬레이드 예술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런던에서 활동 중이다. 사치 갤러리, 런던 필드 프로젝트 스페이스, 저우드 스페이스 등에서 전시했고, 이번에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유튜버이자 패션 아이콘으로 알려진 밀라논나의 차남이기도 하다.
그는 도시에서 만나는 유무형의 소비재를 영감으로 활용해 도시의 불안과 미디어 소비의 역할을 조명했다. 공사 현장의 자재, 건축 폐기물, 산업적 오브제 등을 활용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강해진 디지털 콘텐츠 의존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예술적으로 풀어냈다.
예컨대 ‘Sleek Altar Series 01-17(매끄러운 제단 시리즈 01-17)’은 우리가 숭배했던 종교적 요소들이 현대 사회에서 상품화되고 재화로 변질되는 상황을 꼬집은 작품이다. 가톨릭 성당과 불상, 기도하는 손을 드론과 전쟁 이미지와 병치시켜 동서양과 신구(新舊)의 위계질서가 없어진 현대 도시의 단면을 표현했다.
전시가 진행될수록 도시의 풍경엔 인터넷 이미지가 더해진다. ‘Retinal Chain reaction 01-39′(망막 연쇄 반응 01-39)는 도시의 건물과 풍경에 인터넷 이미지가 덧입혀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민 작가는 “나의 망막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이미지를 가져와 펼쳐본 것”이라며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정보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얼굴 없이 기하학적인 조형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는 도시의 익명성을 표현한 장치로, 수없이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하나의 도시 풍경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작업을 하는 민준홍 작가는 말 그대로 ‘시티 보이’다. 그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매일 스튜디오에 출퇴근하며 성실히 작품 활동을 하지만, ‘자본주의 키즈’로서 끊임없이 갈등한다고 고백한다. 지하 1층 전시장 한쪽 벽면을 채운 드로잉 연작은 작가이자 자연인 민준홍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에 붙은 대사 하나하나가 만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왜? 나는 한정판을 사면 너무 행복해.”“하지만 너의 행복이 얼마나 갈지 생각해 봤어?”“그러면 나는 다음 에디션을 사면 돼.”“결국, 너는 채워지지 않는 중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야.”“또 가스라이팅하지마.”
각각의 도상들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대화를 하다가도 “유행과 콘텐츠를 좋아하는 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살지”라고 받아친다. 도상들은 전쟁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을 가져왔다. 그가 그리는 도시의 인물처럼, 캐릭터들 역시 얼굴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는 캐릭터의 특성을 표현했다.
민 작가는 “다양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접하다 보니 점점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되더라. 영상을 즐기는 자연인 민준홍과, 작가로서 이런 걸 무분별하게 봐도 되나 걱정하는 작가 민준홍 두 개의 자아가 치열하게 싸우는 걸 표현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자본주의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술도 어떻게 보면 자본과 결착된 분야다”라며 “그 안에서 마음껏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해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작품 옆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들이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하길 바라는 취지에서다. 민 작가는 “현대 미술엔 정답이 없다”며 “많은 이들이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데, 미술을 어렵게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작가다. 대중은 작품을 쉽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