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뮤지션(래퍼)이자 미식가로 알려진 최자(45)가 술을 만들었다. 이름은 ‘분자’. 복분자를 주원료로 한 과실주다.
지난달 24일 서울 명동 신세계면세점에서 만난 최자는 술을 마시는 시간을 ‘감정과 감각, 삶의 태도가 녹아든 순간’이라고 했다. 그는 “반주를 즐기다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분자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술을 마시는 시간, 음식과 술의 조화는 모두 내게 위로였다. 음악이 나를 표현하는 도구였다면, 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자가 과실주를 고른 것은 와인처럼 한식에도 곡주나 증류주 외에도 어우러질 수 있는 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한식에 어울리는 과실주가 별로 없었다. 전통주라 해도 대부분이 막걸리나 증류주였다. 프렌치 미슐랭 요리에 와인이 따라오듯, 한식에도 페어링이 가능한 과실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재료는 복분자. 한국에서 자생하는 과일이자 조선시대부터 특산품으로 여겨진 재료다. 그의 부모의 고향이 복분자 주산지인 고창이라는 점도 선택의 계기가 됐다. 시중 복분자주가 전부 주정과 설탕을 이용해 만들어졌단 점도 그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순수한 원물을 써서 술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개발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복분자는 생과 비율을 높여 술로 만들기엔 성질이 까다로운 과일이다. 원물의 산미와 향을 살리기 위해 비가열 공정을 택했고, 설탕·주정·감미료는 철저히 배제했다. 단맛을 위해 사과 원액을 더하는 방법을 택했다. 최자는 “주류회사들이 못 만들고, 안 만드는 이유가 있었다. 맛없는 샘플도 많이 나왔고, 중도 포기할까 싶었지만 오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2년에 걸쳐 복분자와 사과의 배합비를 수십 차례 조정했고, 결국엔 은은한 단맛 위에 묵직한 산미가 끝까지 이어지는 독창적인 맛을 구현했다. 분자 한 병에는 복분자 300알과 사과 5알, 그리고 유럽 내추럴 와인 기준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산화방지제만 들어간다. 최자는 “김치의 신맛처럼, 툭 치는 맛이 아니라 혀를 붙잡는 산미”라고 분자의 맛을 설명했다.
브랜드명 ‘분자’에는 복분자의 ‘분자(盆子)’와 생명의 최소 단위 ‘분자(分子)’가 겹쳐 있다. 병 바닥에는 ‘복(福)’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중적인 언어유희다.
최자는 “원재료만 담은 순수한 술이라는 점이 순수함의 끝인 분자(分子)와 연결된다”면서 “복분자에서 복을 뗐지만 복을 버리진 않았다. 유리병 밑바닥에 순수 한글로 복을 써놓았다. 복분자의 뒤집힐 복(覆)도 되고 행복할 복(福)도 된다. 술을 드시는 분들한테 복을 전달하는 일종의 부적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분자를 만든 도전을 두고 “힙합과 같다”고 표현했다. “다이나믹 듀오로 힙합을 처음 시작할 때 비주류였다. 내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배경도 없었다. 그래도 다양한 시도를 했다. 안 가본 길을 가보는 게 내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최자는 음악과 술 모두에서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힙합이 감정만이 아니라 태도, 삶의 방식까지 담는 장르인 것처럼 술도 마찬가지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철학을 담았는지가 중요하다”면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라, 누가 왜 만들었는지가 느껴지는 술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해 생산된 8만 병은 반년 만에 모두 판매됐다. 최자는 “전문 사업가는 아니지만, 재구매율이 높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기뻤다. 50병을 구매하신 분의 후기가 가장 감동이었다. 재구매는 분자가 맛이 있단 얘기”라고 말했다.
분자는 현재 신세계면세점에 단독 입점해 있다. 면세점 입점을 우선한 이유에 대해 그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과실주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분자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접근이 가능한 술”이라면서 “분자를 기점으로 국산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길 바라는 나름의 소명 의식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자는 “분자가 생산된 지난해, 제 딸이 태어났다. 딸이 성인이 됐을 때 이 술로 함께 건배할 수 있었으면 한다. 1등 하지 않아도 오래 기억되는 술이면 좋겠다”면서 “다이나믹 듀오도 1등이 목표가 아니었다. 스티비 원더처럼 오래 가는 게 목표였다. 분자도 그렇다. 유행을 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브랜드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