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Port)와 셰리(Sherry) 등 ‘주정강화 와인’은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역사와 문학, 일상에서 품격과 연대, 때로는 은밀함을 상징해 왔다. 특히 포트 와인은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자주 등장하며 영국 상류층의 생활과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셜록 홈스 시리즈 중 ‘애비 그레인지(The Adventure of the Abbey Grange)’에서는 포트 와인이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로 사용됐다.
사건은 브래큰스톨 경이 자택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현장에는 반쯤 비워진 포트 와인병과 세 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피해자의 아내와 하녀는 “세 명의 강도가 침입해 남편을 죽이고 태연하게 포트 와인을 마셨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세 개의 잔 중 한 잔에만 포트 와인의 침전물(beeswing)이 남아있다는 점이 탐정 홈스의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는 두 잔만 사용됐고 나머지 한 잔은 연출용이었던 것이다. 홈스는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을 간파하고, 추적 끝에 브래큰스톨 부인과 하녀가 진범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을 꾸몄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셜록 홈스 시리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또 다른 셜록 홈스 시리즈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홈스가 동료들과 사건 해결을 앞두고 포트 와인으로 건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대의 포트 와인은 성공과 연대, 사교와 품격을 대표하는 문화 코드 중 하나였던 셈이다.
포트와 셰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전통에서 비롯됐지만 이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정착한 배경에는 17세기 영국 무역상들의 역할이 컸다. 장거리 해상 운송 중 와인의 산화를 막기 위해 브랜디를 첨가하면서 오늘날의 주정강화 스타일이 형성됐다. 특히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게 당도와 바디감이 강조된 스타일이 발전하면서, 주정강화 와인은 유럽 상류층 문화의 일부가 됐다.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 이민자들이 호주로 이주하면서 주정강화 스타일의 와인도 함께 옮겨갔다. 영국 출신 의사 윌리엄 토마스 앙고브는 1886년 남호주(South Australia)의 티트리 굴리(Tea Tree Gully)에 정착해 취미로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환자 치료용 약용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 경영 와이너리 중 하나인 앙고브 와이너리(Angove Family Winemakers)의 출발점이 됐다.
1910년부터 앙고브 가문은 본격적으로 와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리버랜드(Riverland)와 맥라렌 베일(McLaren Vale) 등에 세인트 아그네스 증류소와 포도 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연중 300일 이상의 일조량과 큰 일교차, 뜨겁고 건조한 기후를 가진 남호주 지역은 껍질이 단단하고 풍부한 당도와 구조감을 가진 포도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다. 주정강화 와인 생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다. 당시 호주 와인 산업의 중심 역시 포트, 셰리 등 주정강화 와인이었고 앙고브도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앙고브의 ‘레어 토니 25년(Angove Rare 25 Year Tawny)’은 와이너리의 숙성 철학이 응축된 작품이다. 토니(Tawny)는 포트 와인의 한 종류로 병 숙성이 아닌 오크통 숙성을 수십 년간 거치며 산화에 따라 색과 맛이 깊어지는 와인이다. 숙성이 진행될수록 와인의 색은 루비빛에서 호박색을 거쳐 갈색으로 변화한다. 견과류, 말린 과일, 캐러멜, 꿀 등의 풍미가 깊어진다.
레어 토니 25년은 평균 숙성 연령이 25년이라는 뜻이다. 가장 오래된 와인은 1971년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80년대 리버랜드에서 수확한 포도를 기반으로, 티트리 굴리의 셀러에서 장기 숙성한 후, 리버랜드의 렌마크(Renmark) 지역으로 돌아와 솔레라(Solera) 방식으로 블렌딩한다. 솔레라는 여러 해의 와인을 겹겹이 섞어가며 오래 숙성하는 방식이다.
세인트 아그네스 증류소에서 사용했던 브랜디 통을 포함해 작고 오래된 미국,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주요 품종인 그르나슈를 기반으로, 화이트 프론티냑, 페드로 히메네스, 머스캣 고르도 등을 함께 블렌딩해 복합적이고 향기로운 개성을 완성한다. 풍부한 향신료 아로마와 산화 숙성 특유의 깊은 농도감을 위해 와인 셀러에서도 가장 더운 상단 배럴층에 저장한 것이 특징이다.
레어 토니 25년은 깊은 레드 색상을 보이며, 풍부한 견과류와 바닐라 향을 갖는다. 깊은 건포도와 구운 견과류의 길고 진한 피니시는 긴 숙성 시간을 한 잔에 담아낸다. 10년 이상의 추가 숙성도 가능하며 개봉 후 12개월 이내 음용이 권장된다. 치즈, 말린 과일, 견과류, 진한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
레어 토니 25년은 2025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베스트 오브 2025’ 주정강화 와인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국내 수입은 ㈜한산더블유앤비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