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초 프랑스 유력 미식 전문 매체 ‘르 셰프(Le Chef)’는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2개 이상을 받은 전 세계 유명 셰프 512명을 대상으로 특별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마치 오스카 수상 연기자들에게 ‘최고의 배우’를 묻거나, 그래미 수상자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가수’를 투표하는 것과 같은 조사였다.
‘셰프들의 셰프’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인물은 바로 ‘요리계의 피카소’라 불리는 피에르 가니에르(75)였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미식의 아버지 폴 보퀴즈, ‘세계 50대 레스토랑 1위’를 차지한 스페인의 거장 후안 로카, 미국에서 가장 많은 미쉐린 별을 딴 요리사 토마스 켈러, 그리고 프랑스 정찬의 마술사 알랭 뒤카스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이 자리했다.
가니에르는 2008년 10월,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세계적인 셰프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호텔은 70억원을 투입해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 34층에 그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을 열었다. 외식업계에서는 한국 파인다이닝(고급 외식)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이 이 순간이라고 여긴다.
가니에르는 본거지 프랑스 파리는 물론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미국 라스베이거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중국 상하이 등 세계 각지에서 10여 개가 넘는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그는 매년 서울을 포함, 전 세계 레스토랑을 직접 찾아 점검한다. 새로운 조리법을 전수하고, 현지 식재료를 찾는 일도 병행한다. 그가 각 국가에 머무는 일주일 남짓한 시간은 발 빠른 예약자들로 만석 행진이 이어진다.
올해 프랑스 샴페인 명가 페리에주에(Perrier-Jouët)가 개최한 행사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달 28일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굉장히 평온하고 안전하게 느껴진다”면서도 “식문화 쪽으로 보면 반대로 거대하고 생생한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 “韓 미식, 17년 동안 빠르게 성장“... 문화로 자리 잡은 파인다이닝
가니에르는 요리 대가(大家)답게 새하얀 조리복을 입고, 은은한 웃음을 띠며 예정보다 10여 분 일찍 등장했다.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이 막 끝난 참이었다. 대가에게 1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처음 서울에 레스토랑을 열었던 2008년에는 주로 나이가 들고 재력이 있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오늘 점심만 해도 대부분이 젊은 커플이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먼저 알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손님들이다.”
가니에르는 서울 파인다이닝 문화가 지난 17년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어느덧 일본 도쿄와 홍콩, 싱가포르와 어깨를 견주는 ‘미식 중심지’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일본과 홍콩은 1980년대부터 이미 요리 세계에서 굉장히 많이 알려졌습니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 한국에 문을 연 2008년은 서울에서 이런 문화에 대해서 막 관심을 두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 시기를 이렇게 함께 해와서 너무 좋습니다. 다만 음식에 대한 열정을 갖춘 사람들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잠재성을 더 끌어내면 좋겠습니다.”
그는 전날 페리에주에 앰배서더로 임명된 한국 젊은 셰프들과 만남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전했다.
“한국의 젊은 셰프들에게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열정과 의지가 느껴졌다. 항상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고, 음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겠다는 자부심이 높아 보였다.”
◇ 퓨전 음식의 창시자... “한식, 고급 샴페인과도 잘 어울려”
가니에르는 고전적인 프랑스 조리 방식에 여러 나라에서 발굴한 독특한 식재료와 현대적인 조리 방식을 섞은 퓨전 퀴진(fusion cuisine) 운동을 선도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우리가 흔히 ‘퓨전 요리’라고 말하는 그 단어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가니에르가 나온다.
그는 이번 방한에서도 프랑스를 상징하는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에 한식 식재료와 조리 방식을 사용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줬다. 일반적으로 미묘한 풍미를 중요시하는 샴페인은 맵거나, 짠 한식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니에르는 다른 해석을 내놨다.
“점심에 젊은 셰프들이 준비한 자리에서 겉보기에 프랑스 요리지만, 한국 재료를 사용한 음식을 맛봤다. 굉장히 한국적이라 느껴지는 맛이었지만, 조리법을 바꾸니 전형적인 한식 재료에서 오는 생소한 맛이 바로 다음 맛에 자리를 내주면서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 음식들에 샴페인을 곁들였더니, 생기 넘치고 청량감 있는 샴페인이 음식 맛의 빈자리를 계속해서 채웠다.”
그는 한식에서 자주 사용하는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가진 고소함이 샴페인 특유의 짭조름한 미네랄리티(무기질)과 잘 어우러진다고 덧붙였다. 특히 발효 음식 중에서 간장이 품은 깊은 맛과 샴페인이 가진 산미(acidity)가 기막힌 균형감을 이룬다고 했다.
◇ 15살부터 75살까지... 60년 요리 외길 인생
가니에르는 15살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올해 일흔다섯이니, 요리를 시작한 지 딱 60년이 지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프랑스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였다. 그는 “내 삶 전체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레시피를 의도적으로 구상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니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21살이 되던 해, 프랑스 남동부 작은 마을 생테티엔에 스스로 첫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미쉐린가이드에서 별 하나를 땄다. 1993년에는 별 셋을 달았다. 고작 40대 중반이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40년 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사진을 직접 찾아 보여줬다. 그는 “40년 전 인터뷰 기사를 최근에 다시 읽어봤다”고 했다.
“당시와 지금의 철학이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음식 만들기에 온전히 헌신하고, 세부 사항을 꼼꼼히 챙기고, 맛의 구성에 집착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른다.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 생각들이 모이면 나도 만족하고, 궁극적으로 손님을 만족시키는 음식이 탄생한다.”
◇ “예쁜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이 우선”
가니에르는 유달리 아름다운 플레이팅(음식 배치)을 선보이기로 유명하다. ‘요리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이유다.
그에게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로 요리 사진을 공유하는 현시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가니에르는 “셰프로서 외관에 치중하는 음식이 많아지는 현상은 아쉽다. 메뉴가 인스타그램에 공개되면 손님도 기대감이 사라진다. 셰프들은 따뜻한 음식이 사진 찍는 도중 식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그저 보기에만 좋은 차가운 음식이 많아진다. 나는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음식 본연이 가진 맛과 정직함을 중시한다.”
그는 셰프들이 지나치게 음식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니에르는 “예술적인 시도가 맛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화가가 아니라 맛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플레이팅이 맛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손님들이 사진 두 장을 전했다. 가니에르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이들은 집에서 직접 사진을 인화해서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는 사진 한 장에 금색 사인펜으로, 다른 사진에는 은색으로 정성스럽게 사인을 남겼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든 주방에서 어떻게 60년을 서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가니에르는 자리를 일어나면서 “나라고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과음하지 않는다. 당연히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적당히 운동하고, 휴식을 충분히 취한다. 그리고 물을 많이 마시고, 식사는 채소 위주로 먹는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