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미국이 전 세계 외식 문화를 주도하는 ‘중심지’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미국은 ‘요리(cuisine) 불모지’였다. 오로지 미국 음식 하면 ‘햄버거와 콜라’ 같은 패스트푸드 뿐이었다. 그저 값싼 가공식품과 냉동식품이 미국인들 식탁을 누볐다. 국토는 넓고 비옥하지만, 그 땅에서 자란 질 좋은 식재료를 멋지게 요리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오랜 기간 지지부진하던 미국 외식업계는 1990년대 접어들어서야 양적으로, 질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인류학자들은 소위 미국에 본격적으로 ‘음식 민주주의(food democracy)’가 도래한 시기를 이 무렵이라고 본다. 음식에 민주주의를 결합한 음식 민주주의란 단어가 다소 어색할 수 있다. 대체로 이 단어는 ‘본인이 가진 예산 안에서 영양학적으로 건강하고, 조리법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음식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주머니에 10달러(약 1만2000원) 지폐 한 장뿐인 소비자가 이 개념에 부합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풍족한 미국에서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전에 이 돈으로 고작 냉동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사먹어야 했다면, 이제는 푸드트럭에서 뉴욕의 세계적인 요리학교 CIA를 졸업한 요리사가 만든 수준급 타코나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500달러를 쓰고 싶다면 맨해튼 한 가운데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갈 수도 있다. 이런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요리사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와인의 본산이자 미식(味食)하면 빼놓을 수 없는 국가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와인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생필품에 가깝다. 동네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고, 단골 마트에서 본인이 자주 찾던 와인을 골라 집에 돌아오는 것이 프랑스 사람들 일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형마트와 계열 기업형슈퍼마켓(SSM)이 동네 마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다양한 소규모 와이너리 와인 대신 대규모 물량을 프랑스 전역에 공급할 수 있는 거대 주류제조업체 소속 브랜드 와인이 시장 주도권을 잡았다.

동시에 평균 와인 구매 가격도 물가상승률보다 가파르게 뛰었다. 대다수 대형 브랜드가 만드는 기본급 와인은 여러 지역 포도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소비자 취향을 존중하거나 다양성을 추구하기 어렵다. 프랑스 와인 소비자들은 이전처럼 본인 입맛에 맞는 와인을 고르려면 결국 이전보다 비싼 값을 주고 해당 브랜드 상위 등급 와인을 사야했다. 이들 윗등급 와인은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져 매년 값이 뛰었다.

오래도록 와인을 마셨던 프랑스 소비자로선 수도 없이 많은 와인이 쏟아져 나오지만, 결국 본인 예산 안에서 이전에 쉽게 마셨던 와인들을 같은 값을 주고서는 더 이상 마시기 어려운 상황이 닥친 셈이다.

그래픽=손민균

제프 까렐은 파리에서 화학자로 일하다 1991년 ‘화학적인 지식을 살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렴한 지역에 밭을 개간해 와인을 만들면 질 좋은 와인을 파격적인 가격에 공급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양조학 공부를 시작해 학위를 따고 20년 넘게 프랑스 여러 와이너리를 돌아 다니면서 실무를 배웠다.

2017년, 그는 양조학을 배운 지 26년 만에 스페인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 최남단 루시옹 지역에 와이너리를 열었다. 주변에서는 ‘새 와이너리를 지으라’고 조언했지만, 까렐은 굳이 산 중턱에 오래도록 사람 손이 닿지 않은 폐(閉) 와이너리를 살리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새 설비를 들여 번듯한 와이너리를 지을 때보다, 오래된 와이너리를 고쳐 사용하는 것이 와인 가격을 낮추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나온 와인은 첫 해부터 베를린 와인 트로피를 포함한 세계적인 와인 경연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많은 소비자들이 흔히 ‘비싼 와인이 맛있다’고 하고 ‘저렴한 와인은 값이 싼 이유가 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듯 소위 ‘천재 와인 생산자’라고 불리는 일부 양조가들 사이에서는 좋은 밭에서 나는 비싼 포도로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이들은 오히려 남들은 거들떠 보지 않는 저렴한 지역에서 자란 포도로 영감을 줄 수 있는 와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라고 평가한다.

까렐 역시 이런 철학을 와인 가격에 그대로 반영했다. 그가 내놓는 와인 30여종 가운데 25종은 프랑스 현지 소매가격 기준으로 10유로(약 1만3000원)를 넘지 않는다. 넘는 와인 5종 가격도 12~16유로 정도다. 그가 만드는 와인은 아무리 비싸도 현지가 기준으로 2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시에 품종 별로 소량 생산해 지역적인 특색과 포도 품종 고유의 맛을 살렸다. 이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까렐을 ‘저렴하지만, 개성있는 프랑스산 와인을 누구나 맛볼 수 있는 와인 민주주의(wine democracy) 시대를 연 천재 와인 양조가’라고 평가한다.

수없이 많은 다른 소규모 와이너리들은 까렐과 같은 시도를 하다 자금이 부족해 무너졌다. 반면 까렐은 2017년 등장과 동시에 받은 기대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가 만드는 대표 와인 가운데 하나인 울띰헤꼴뜨는 뮈스카(muscat)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품종 포도를 사용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 때 주로 쓰는 ‘모스카토’와 거의 같은 품종이다.

울띰은 라틴어 ‘울티마(ultima·궁극)’와 같은 프랑스어, 헤꼴뜨는 ‘수확(collect)’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말하자면 울띰헤꼴뜨는 ‘궁극의 수확’이라는 뜻이다.

까렐은 좋은 와인을 만들기 어렵다고 소외받았던 이 품종으로 약간 단맛이 살아있지만 산도와 신선도가 있어 미각을 자극하는 와인을 만들어 냈다.

2016년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2018년 처음 선보인 이 와인은 출시 직후 프랑스 유명 미식매체 기베르 가이야르가 선정한 금메달 와인으로 꼽혔다.

이후 2022 대한민국주류대상에서도 구대륙 화이트와인 3만원 미만 부분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하이트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