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더 이상 서민의 술이 아니에요.”
하이트진로(000080)가 소주 출고가를 인상한 23일 저녁. 선술집이 늘어선 서울시 서초구 양재역 4번 출구 뒷골목은 소주 판매 가격이 6000원으로 통일됐다.
친구들과 모임차 이곳 골목을 찾았다는 직장인 이일권씨는 “만원으론 소주 두병도 못 마시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골목 초입에서 20m가량 떨어진 한 선술집은 이날 소주 가격을 기존 5000원에서 6000원으로 1000원 인상했다. 사장 이모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매출이 줄었다”면서 “소주 출고가까지 오른다는 말에 인상을 결정했다. 우리가 제일 늦게 올렸다”고 했다.
‘가볍게 소주나 한잔하자’는 말은 옛말이 됐다. 20년 전 식당에서 소주 한병은 2000원이었다. 이후 소줏값은 3000원으로 올랐고 몇 년 전부터 4000원으로 뛰더니 급기야 6000원 시대가 열리고 있다. 소주 한병에 9000원을 받는 식당도 등장했다.
소주 제조사의 출고가 인상이 발단이 됐다. 하이트진로는 이날부터 ‘참이슬 후레쉬’ ‘참이슬 오리지널’ 등 주요 소주 가격을 병당 1081.2원에서 1163.4원으로 82.2원(7.9%) 올려 출고했다. 2019년 5월 병당 65.5원 인상 후 3년여 만으로 인상폭이 25% 뛰었다.
소주 업계 1위인 하이트진로를 따라 소주 출고가는 줄줄이 인상되고 있다. 무학은 다음달 1일 소주 ‘좋은데이’와 ‘화이트’의 출고가를 1163.4원으로 평균 8.84% 인상한다. 보해양조는 3월 2일 ‘잎새주’ 등 소주 출고가를 평균 14.6% 인상하기로 정했다.
2위인 롯데칠성(005300)음료도 ‘처음처럼’ 가격 인상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소주의 원료가 되는 주정 가격이 올랐고 병뚜껑 등도 올라 가격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제조사의 출고가 인상이 도매가 인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판매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서울시 관악구에서 어묵집을 운영하는 장모씨는 “아직은 소주 한병을 4000원에 팔고 있지만, 들여오는 가격이 올라 인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외식업계에 따르면 소주 판매 가격은 제조사의 소주 출고가를 기준으로 유통 단계를 거치며 빠르게 부풀려지는 구조다. 짝(소주병을 담아 식당에 납품하는 틀) 단위 납품 기준 참이슬 1짝(30병) 가격은 이날 기존 4만5500원에서 4만9500원으로 4000원(9.4%) 올랐다.
하이트진로는 출고가를 7.9%를 올렸지만, 도매 유통을 거치며 인상폭이 9.4%로 오른 것이다. 식당은 여기에 매장 임차료, 인건비 등을 반영해 판매가를 결정한다. 주류법상 하이트진로 등 주류 생산업체는 소주 등을 제조만 할 수 있고 유통 면허를 갖지 못한다.
소주 가격 인상은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 손님이 많아 소줏값이 40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서울시 관악구 식당가마저 일제히 가격 인상을 검토하고 나섰다. 조선비즈가 이날 관악구 일대 식당 10곳을 조사한 결과, 모든 음식점에서 ‘인상 계획이 있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오르지 않은 것이 없는 가운데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영업시간이 제한되면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부담은 오히려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주 매입 가격까지 올라가자 기존 가격 유지가 어려워진 것이다.
서울시 관악구에서 삼겹살집을 운영하는 강모씨는 “물가 상승, 인건비 등에 대응하려면 음식 값보다 덜 민감한 소주 값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어집을 운영하는 황모씨는 “이미 6000원을 받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면서 “4500원은 받아야할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시 강남구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도매 유통 가격을 포함해도 병당 150원 남짓 오르는 셈인데 판매 가격을 500~1000원까지 올리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는 시선이 있는 것을 안다”면서도 “전기요금까지 오르는 상황인데, 술값 외엔 올릴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소주 한병 가격이 9000원인 곳도 등장했다.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의 한 일식집은 소주 한병을 9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한병에 8000원을 받고 팔았지만, 지난해 말 이미 물가 인상을 예견하고 소주 값을 1000원 인상했다.
소비자 부담은 커지고 있다. 식당의 소주 판매가 줄인상 속에 홈술용(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 소주도 올랐다. 국내 주요 편의점은 이날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후레쉬와 참이슬 오리지널 출고가 인상에 따라 판매가를 기존 1800원에서 1950원으로 8.3% 인상했다.
대형마트도 판매 가격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재고분은 기존 가격으로 판매하고 이후 인상률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아직은 가격 인상폭이 확정되지 않았다”면서도 “대략 7~8% 인상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