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제외한 국가에 90일 동안 상호 관세 부과를 유예하면서 대미(對美) 수출을 늘려온 국내 유통업계도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는 모양새다. 그러나 여전히 3개월 후 관세 재개 가능성이 여전하고, 원·달러 환율도 1400원대 중반을 기록하는 등 불확실성은 크다. 업계는 정부의 협상 과정을 주시하며 대응책 마련에 한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 시각)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트루스소셜’을 통해 “75개국 이상이 무역, 관세, 환율조작, 비관세 장벽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미국과 협상을 원하고 있다”며 “이들 국가는 어떠한 보복 조치도 취하지 않아 90일간 상호관세 부과를 유예하고, 10%의 기본 관세율도 상당히 낮추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보복 관세로 맞선 중국에 대해선 관세율을 125%까지 높이겠다고 했다.
식품업계는 일단 반색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케이(K)푸드 수출액은 130억달러(약 19조원)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 중 미국 수출액은 15억9000만달러(약 2조3000억원)로 12.3%를 차지했다. 라면 등 가공식품 수출이 전년 대비 31%가량 늘어난 영향이 컸다. 정부는 올해 K푸드 수출 목표액을 지난해보다 8.1% 증가한 140억달러(약 20조4000억원)로 설정하기도 했다.
가장 큰 수혜 기업 중 하나는 ‘불닭볶음면’을 생산하는 삼양식품(003230)이다. 회사는 지난해 매출 1조7280억원 중 해외 비중이 77%(1조3359억원)에 달하며, 전체 수출의 28%가 미국 시장에서 발생했다. 삼양식품은 모든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관세 영향을 직접 받는 구조다.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긴 어렵다는 평가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이달 초 미국의 상호관세 발표 직후부터 관련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대응 방안을 모색해 왔다”면서도 “미국 정책이 워낙 급변하고 있어 개별 기업이 선제적으로 행동을 취하기는 어렵다. 우리 정부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며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가’ 브랜드를 앞세워 글로벌 김치 분야 1위를 기록 중인 대상(001680)도 관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상은 2022년 미국 LA에 공장을 세우고 2023년 현지 업체 럭키푸즈를 인수하며 현지 생산을 확대했지만, 여전히 한국산 수출량이 현지 생산량의 두 배 수준이다.
식품 기업들은 정부 차원의 지원과 대미 협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8일 농림축산식품부가 개최한 수출기업 간담회에 참석해 수출 바우처 확대와 수출 시장 다각화, 무역 금융 확대 지원 등을 요청했다.
패션 업계도 관세 유예로 일단은 숨통이 트였다. 패션 업체들은 대부분 인건비 등의 문제로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생산설비를 갖춘 뒤 브랜드 패션회사의 주문을 받아 의류를 제작하고 중간 이익(마진)을 취한다. 그런데 베트남산 제품엔 46%의 관세가 부과될 예정이었다.
패션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량을 늘리거나, 공장 이전 등을 계획 중이다. 일례로 한세실업(105630)은 베트남에 있는 공장 8곳에서 전체 의류의 약 40%를 생산하는데, 미국 수출 비중이 85%에 달한다. 이 회사는 관세율이 10%로 낮은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등지에 보유한 공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또 지난해 9월 인수한 미국 섬유업체 ‘텍솔리니’의 현지 공장을 활용한 미국 내 생산 물량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가구 업계도 관세 리스크(위험)에 주목하고 있다. 매트릭스를 주력 상품으로 둔 현대백화점(069960)그룹의 가구 제조 부문 자회사 지누스(013890)는 총매출액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로 대부분인데, 전체 생산량의 약 70%를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다. 미국이 인도네시아에 부과한 상호 관세율은 32%다.
업계 일각에서는 지누스가 주요 고객사와 협상을 통해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누스 관계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의 이번 관세 유예 조치에 대해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우리 업계가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 “다른 국가들의 협상 진전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국익 극대화를 위한 신중한 전략으로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관세 유예 기간 중 이뤄질 협상에서 한국은 최소 비용을 지불하면서 미국에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카드를 꺼내야 할 것“이라며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조선업 협력 확대 등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관세가 단기간 유예됐지만 방향성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라며 “유통 기업들이 받을 직접적인 피해도 있겠지만, 다른 산업군의 수출이 악화하면 내수 경제가 더 침체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어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 유통 기업들은 동남아, 유럽 등 다양한 지역으로 수출을 다변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