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떤 이는 그 시작을 ‘불의 발견’에서 찾는다. 인류가 불을 손에 쥐었을 때, 음식은 더 이상 단순한 생존의 수단이 아니게 되었다. 날것을 먹던 시대를 지나며 우리는 ‘맛’이라는 감각을 진정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불은 불순물을 없애는 등 위생을 확보하는 동시에 음식에 감각적 깊이를 더했다. 마이야르 반응을 통한 단백질의 변화는 물론, 농축, 훈연, 탄 향 등 새로운 풍미를 느끼게 한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때부터 어쩌면 우리는 음식을 단순히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불은 미각의 문을 연 열쇠였다.
그러나 그 정점은 ‘소스’의 발견이다. 소스는 인류가 미각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든 기술이자 예술이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등 단일한 맛이 아닌, 그 조합과 배합 속에서 음식은 예술의 경지로 진입하게 됐다. 소스를 만들며 인류는 깨달았다. 맛은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소스가 음식 속 차지하는 그 절대적인 양은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탁월함은 결코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때론 가장 적은 비중일지라도 그 영향력은 가장 클 수도 있다. 가령 샐러드로 예를 들어보자.
유자와 일본식 간장을 배합한 소스 한 숟갈이면 샐러드는 동양적인 느낌이 난다. 그러나 올리브오일과 레몬즙을 부으면 서양식 비네그레트(Vinaigrette)로 재탄생한다. 또 소스의 존재감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육류 요리의 대명사인 스테이크부터 담백한 두부까지, 소스는 늘 자신이 닿는 모든 재료의 성격을 결정한다.
보통 소스는 불에 졸여 끓이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공식 자체를 바꿔버린 이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전설적인 셰프인 야닉 알레노 셰프다. ‘소스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그가 미식계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프랑스를 비롯해 한국 등 17개 국가에서 미슐랭 별 15개 이상 수상한 것이 그 징표다. 특히 그가 고안한 ‘익스트랙션(Extraction·추출)’이라는 기법은 현대 미식계의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의 접근은 기존의 관념을 벗어난다. 보통 소스라고 하면 불로 졸여 만드는 형태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는 물, 냉각으로서 소스라는 요리의 꽃을 피워낸다. 알레노 셰프에 따르면 불은 필연적으로 파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향이 증발하거나 소스 가장자리가 타면 쓴맛이 생기기도 한다. 형태도 바꾼다. 맛은 진할 수 있지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익스트렉션은 다르다. 불이 아닌 저온 수중 조리와 냉동과 해동의 과정을 거친다. 불이 파괴라면 냉각은 ‘보존’이다. 저온 수중 조리로 재료의 ‘정수’를 뽑아내고, 냉동과 해동의 과정을 통해 순수한 맛의 층을 분리해낸다. 이렇게 얻어진 소스는 향과 영양,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도 깊은 풍미를 끌어낼 수 있다. 익스트랙션으로 탄생한 소스는 보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깊고 깔끔한 맛을 지닌다.
그런 알레노 셰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국내에도 있다. 바로 시그니엘 서울의 모던 프렌치 레스토랑 ‘스테이(STAY)’다. 스테이는 전통과 현대가 함께 흐르는 브랜드로, 두바이,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에도 입점해 있다. 알레노 셰프는 스테이의 매력으로 환상적인 뷰(view)와 그에 걸맞은 음식의 수준을 꼽았다. 결국, 음식은 사랑하는 이와 먹으면 더욱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지론과 함께 말이다.
그에게 스테이를 찾는 고객들에게 해줄 한 마디를 물었다. 그러자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천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Paradise)”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야닉 알레노 셰프다. 프랑스 파리 출신이다. 시그니엘 서울 스테이는 8년 전에 열었다. 프랑스 미식 문화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전통은 존중하되, 현대적인 기술과 감각, 과학적 사고를 접목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특히 소스는 요리 세계의 핵심이다. 단순 곁들이는 것이 아닌, ‘맛의 언어(Language of flavor)’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니엘 서울 스테이는 어떤 곳인가.
“시그니엘과 같은 아름다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스테이가 특별한 이유기도 하다. 스테이는 축하(celebration)를 위한 공간이다. 특별한 날, 인생의 기억을 남기고 싶은 날에 어울리는 곳이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환상적인 전망도 꼽고 싶다. 또한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를 기본으로 편안한 분위기와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서울에 다시 온 소감이 어떠한가. 서울의 변화가 느껴지는가.
“서울은 올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미식의 수준이 정말 눈부시게 성장했다. 올해 밍글스가 미슐랭 3스타를 받은 것도 그 증거다. 서울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넘어서 깊이 있는 ‘경험’을 주는 도시다. 미식가들, 일명 푸디(foodie)들이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등, 한국의 미식 지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한국 미식 문화 중 흥미로운 것이 있나?
“김치를 좋아한다. 또 발효한 그 모든 야채 요리들도 좋아한다. 한국의 발효, 숙성 문화는 셰프인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한우의 깊은 풍미도 그렇지만 해산물 역시 훌륭하다.”
―최근 접한 한국 재료 중 인상 깊게 느낀 것이 있었나.
“한국에서 먹은 전복은 맛이 매우 좋았다. 전복을 통해서 한국 요리의 진화를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비채나’(Bicena)는 한국 셰프들이 어떻게 한국 요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전복 안에 밥을 채운 요리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스테이 메뉴 중에서도 한국 재료와 프랑스 음식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나.
“물론이다. 스테이에서는 한국의 채소나 해산물, 육류 등을 프렌치 기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면 트러플이 들어간 시금치 샐러드가 있다. 이 메뉴는 프랑스와 한국의 풍미를 모두 담고 있다.”
―훌륭한 요리를 만드는 조건이 궁금하다.
“‘사랑(love)’이다. 요리는 결국 사랑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 팀에 대한 존중, 재료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더 나은 요리가 만들어진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에 달렸다.”
―자신의 요리를 정의하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전통과 혁신의 조화다. 과거를 존중하되, 현재와 미래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방향이다. 모던 프렌치는 전통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덧입힌다. 특히 나는 소스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프렌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단연 소스다. 소스는 프렌치 요리의 ‘동사(verb)’로 생명력을 부여한다. 또 그 자체로도 요리다. 프랑스는 소스로 성장한 나라다. 19세기의 유명한 요리사 에스코피에(Escoffier)도 그의 요리책에서 71페이지나 소스에 할애한다. 소스를 이해해야 프랑스 요리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소스가 주방뿐 아니라 음식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소스는 그 자체로 창조의 도구다. 스테이크를 잘 굽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훌륭한 소스가 곁들여지면 인생이 달라지는 미식 경험이 가능하다.”
―처음 만들었던 소스는 기억 나나.
“홀랜다이즈(Hollandaise) 소스다. 소스를 만들기 위해 달걀을 달그락 달그락거리던 소리도 기억난다.”
―익스트랙션이라는 기법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데, 과연 무엇인가.
“익스트랙션은 간단히 말해 원재료를 완벽한 시간과 온도로 조리해 그 정수를 뽑아내는 방식이다. 기존 방식은 소스를 끓여 농축시킨다. 그러나 나는 얼려서 맛을 ‘보존’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샐러리악을 예로 들면 83도에서 12시간 조리하면 완벽한 맛이 난다. 83도를 넘기면 미네랄리티가 파괴되고, 그 아래는 충분히 추출되지 않는다.”
―익스트랙션으로 설명되는 저온 조리와 냉각과 해동이 가진 이점이 궁금하다.
“불은 필연적으로 파괴를 낳는다. 증발되는 향과 소스의 가장자리가 타면서 쓴맛이 생기기도 한다. 구조도 바뀐다. 반대로 ‘냉각’은 보존의 미학이다. 저온 수중 조리, 냉동과 해동의 과정에서는 어떤 것도 파괴되지 않는다. 재료의 정수만 뽑아낼 수 있다. 그 결과물은 매우 순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새로운 메뉴는 어떻게 개발하는가.
“재료에서 시작한다. 금태라는 생선도 지역이 다르면 맛이 완전히 다르다. 재료를 맛보고, 그것이 자란 환경과 테루아(terroir·토지)를 상상하며 레시피를 구성한다. 가령 오늘 아침 먹은 성게는 주니퍼 베리(두송자)의 향이 났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조합이 가능하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요리나 소스를 비교하자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소스의 갈래 중 하나를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소스에 대한 나의 철학으로 나를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다(A boy from nowhere). 그렇지만 이 일이 내게 모든 것을 가져다줬다. 미래는 ‘문화’의 힘이 이끌 것으로 믿는다.”